해따지 사과가 탐스럽게 익어 가는 생활 문화 공동체, 원봉계 마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1377
한자 - - - - - 生活 文化 共同體 , 元鳳溪 -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고제면 봉계리 원봉계 마을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배병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10년 경 - 해따지 사과가 탐스럽게 익어 가는 생활 문화 공동체, 원봉계 마을 성주 이씨, 진양 하씨 입향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0년 경 - 해따지 사과가 탐스럽게 익어 가는 생활 문화 공동체, 원봉계 마을 내당 마을 조성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5년 - 거창 원봉계 마을 2015년 문화 체육 관광부 생활 문화 공동체 공모 사업 선정

[정의]

특산물 해따지 사과와 함께 마을 만들기의 성공 사례로 이름난 거창군 고제면 봉계리의 자연 마을.

[개설]

경상남도의 최북단에 위치한 거창군 고제면 봉계리원봉계 마을은 2015년 문화 체육 관광부 주최 생활 문화 공동체 공모 사업에 선정되어 성공적 마을 만들기의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300년 전통의 원봉계 마을한국 전쟁 난민 정책 사업으로 탄생한 내당 마을은 비록 이질적으로 출발하였지만, 마을 만들기 사업을 통해 하나로 뭉쳐 그 옛날의 정다운 공동체 문화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어 가고 있다. 태극기를 사랑하는 호국 마을, 해따지 사과로 고소득을 올리는 넉넉한 마을, 범죄와 화재가 없는 안전한 마을을 만들어 가는 원봉계 마을 주민들의 프로젝트는 오늘도 진행 중이다.

[원봉계, 마을 만들기의 대명사]

원봉계 마을을 찾기 위해 버스 정류소에 내리면, 우선 커다란 사과 모형 아래 마을 유래를 써 놓은 입간판이 눈에 띤다. 그 곁에는 마을 표지석과 함께 경상남도로부터 2007년도 범죄 없는 마을에 선정되었음을 알리는 비도 서 있다.

이들을 뒤로 하고 적당히 가파른 마을길을 따라 한참을 걷는다. 족히 400~500m는 걸어올라 왔을까? 넓은 마당에 경로당 겸 마을 회관이 보이고, 그 앞에도 붉은 사과 모양의 안내판이 있다. 2015년 문화 체육 관광부와 한국 문화원 연합회에서 실시한 생활 문화 공동체 공모 사업에 이 마을이 선정되어 마을 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문화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곳 원봉계 마을이 요즘 거창군의 역점 사업인 ‘마을 만들기’의 모범적 사례로 손꼽힌다는 사전 정보가 그제서야 떠오른다. 일견 평범해 보이지만 생동감이 넘치는 원봉계 마을, 이곳에는 어떤 특별한 사연이 있을까?

[원봉계 마을의 어제와 오늘]

원봉계 마을이 속한 거창군 고제면 봉계리는 경상남도의 최북단으로, 전라북도·경상북도와 접하는 소백산맥의 한 켠에 위치하고 있다. 봉계리에는 원봉계 외에도 내당, 탑선, 지경, 소사, 원기 등 5개 자연마을이 더 있는데, 이들 중 내당은 근래에 만들어진 마을로 원봉계와 한 마을로 친다.

해발 550m의 고지대에 자리한 원봉계 마을은 전라북도 무주로 가는 길목이다. 북서쪽의 삼봉산[1,254m]이 무주와 경계를 이루며, 동쪽은 대덕산, 초점산에 이어지는 거대한 산줄기로 막혀있다. 서쪽 산기슭에 마을이 형성되어 동쪽으로 입구가 나 있으며, 고지대로부터 차례로 양지담, 웃담, 아랫담이라 하고, 이웃한 내당은 샛담[새터]이라 부른다. 마을 앞으로는 대덕산에서 발원한 황강천이 지방도 1089호선[고제로]을 따라 흐른다. 북으로는 원기, 남으로는 봉산리 와룡 마을과 접하며, 동쪽의 땀내기재를 넘으면 웅양면 신촌리로 통한다. 마을로부터 정남 방향의 면 소재지[봉산리]와는 약 7km의 거리가 있다.

본 마을인 원봉계는 옛날 ‘당곡(堂谷)’이라 하였고 지금도 ‘당골[땅골, 당꼴]’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신라시대에 절이 있어 마을 근처 골짜기 마다 불당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절이 없어지고 엄씨가 처음 마을을 열었으며, 1710년경부터 성주(星州) 이씨(李氏)와 진양(晋陽) 하씨(河氏)가 들어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당골’이 ‘원봉계(元鳳溪)’로 불리는 것은 1837년 이 마을에서 태어나 동학농민전쟁 때 공을 세웠다는 봉서(鳳棲) 하종호(河宗浩)의 호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진양 하씨 재실인 영모재(永慕齋)는 한국전쟁 당시 허물어진 것을 재건한 것이다. 마을 초입에는 일제시기 고제면장을 역임한 하태욱(河泰郁)을 기리는 비[모계진양하공지묘(慕溪晋陽河公之墓), 2001]가 있다. 맞은편 수고 27m, 둘레 6.7m의 느티나무는 1980년대까지 당산제를 지냈던 마을신앙의 대상으로, 그 수령이 약 650년에 이르며,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이 느티나무 아래에서 옛 선비들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는데, 이를 기리기 위해 2008년 ‘고제유계유적비(高梯儒契遺蹟碑)’를 세웠다. 이러한 지적 전통 때문인지 대사관, 교육감, 시장, 대학 총장 등 많은 정·관계, 교육계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이웃한 내당은 한국전쟁 후 시행한 난민정책 사업으로 미국 정부와 기독교재단의 지원을 받아 조성된 마을이다. 1960년 경 토지 300여 평에 집을 지어 약 50여 세대에게 제공하였다 한다. 당초에는 당골 안쪽에 있어 ‘안당골’이라 부르다가, 이를 한자어로 표기하여 ‘내당(內堂)’이 되었다.

마을 노인들의 기억으로는 한때 이 마을에 400~500호 가까이 살던 때도 있었다. 마을이장인 이해룡[1952년 생]씨가 어릴 적에도 약 200호 가까운 인구가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현재 인구는 약 60세대에 140여 명, 이들 중 노인 인구가 70%를 차지한다.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들깨, 콩 등도 재배하고 있지만 소득을 올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소비용이며, 주소득원은 사과 농사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산업화 이후 젊은이들이 모두 떠나고 노인들만 덩그러니 남겨진 흔한 시골마을과 같지만, 그럼에도 마을 공동체가 유지되고 활력이 넘치는 것은 거창군의 고소득 특산물 사과 때문이다.

[해따지 사과와 태극기]

사과는 생육기[5월~10월]의 평균 기온이 2~30도, 성숙기[10월 초순~11월 초순]에는 일교차가 10도 이상은 되어야 가장 좋은 색과 맛을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과로 유명한 거창이지만, 그 중에서도 고제면이 재배의 최적지인 것은 일교차가 심한 고랭지인 까닭이다. 한랭한 기후로 병충해에 강하고, 까다로운 재배조건에 맞추기 위한 인위적 노력들을 덜 수 있다. 그만큼 고제면의 사과는 인공적인 것을 배제한 그 본연의 맛을 낸다. 해발 5~600m의 마을에서 생산된 이러한 최상의 사과를 고제면에서는 ‘해따지 사과’라고 이름 붙였다. 해를 딸 수 있을 만큼 고랭지에서 재배했다는 의미의 사과 브랜드이다.

해발 550m의 원봉계 마을은 약 90%의 주민들이 사과 농사에 종사한다. 나머지 10%는 생산 활동을 할 수 없는 고령자들이니, 사실 100%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최근에는 이 마을 출신 청장년들이 자녀 교육 때문에 읍에 거주하면서 사과농사를 짓기 위해 이곳으로 출퇴근 하는 경우도 흔하다. 게다가 은퇴 후 고소득 영농을 꿈꾸며 찾아오는 귀농인들도 늘어, 내당마을에는 이들이 6개월 동안 생활할 수 있는 ‘귀농인의 집’도 갖추어져 있다.

거창군에서도 2011년 내당 마을 위편에 ‘거창사과테마파크’를 조성하여 이곳이 거창사과의 주산지임을 알리고 있다. 2014년에는 ‘색깔있는 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집집마다 대문 위에 사과형 아치를 설치하는 등 사과 마을로의 변신에 예산을 지원했다. 이로써 원봉계 마을은 사과를 소재로 관광과 체험을 겸한 대한민국 최고의 사과산업 메카로의 발전을 기대하고 있다.

사과 외에 또 하나 원봉계 마을을 상징하는 이미지라면 집집마다 365일 게양되어 있는 태극기일 것이다. 이로 인해 태극기를 사랑하는 호국마을로 몇 차례 언론에도 소개된 바 있다.

태극기 게양하기 운동은 이 마을 이장이 개인적으로 자택에 달고 이웃에도 권하여 시작된 것인데, 그 사연이 알려지면서 관청이나 주변의 후원자로부터 부족한 태극기의 물량을 지원받기도 했다. 소박한 애국심과 마을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아이디어 차원에서 시작된 캠페인이지만 이제는 주민들은 단합시키고 마을을 알리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로써 동업에 종사하는 경제적 공동체인 원봉계 마을에 새로운 정체성이 추가되었고, 이제는 그동안 잊고 지냈던 그 옛날의 정답던 생활문화공동체의 복원도 꿈꾸게 되었다.

[주민들이 행복한 생활 문화 공동체]

‘문화가 있는 원봉계 마을 가꾸기’ 사업은 거창군에서도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대표적 마을만들기의 사례이다. 거창군의 설명에 의하면, 마을 만들기란 “마을 고유의 자원과 특성을 이용하여, 주민 스스로가 사업을 결정하고, 예산 지원 종료 후에도 지속 가능한”, 한 마디로 “생산적 복지 마을”을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 하겠다. 이러한 마을 만들기의 여러 가지 사업 방향 중에서도 원봉계 마을에서는 주민들의 자발성에 역점을 두었다.

“마을 사업이란 것이 소득 중심을 탈피하고, 마을의 특색을 제대로 살려서 주민들이 진정으로 행복한 그런 사업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다음에 관광객을 유치하든 소득을 올리든 해도 무리가 없을 테지요.”

원봉계 마을 이장 이해룡은 소득 중심의 마을 만들기 사업에 비판적이다.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에 의한 생활 문화 공동체를 우선 구축하고 소득은 그 다음 차원이라는 것이다. 원봉계 마을은 그것을 산업화 이전 정답던 마을을 복원하는 것에서 찾았다.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2015년 문화 체육 관광부의 ‘생활 문화 공동체 공모 사업’에 거창 문화원이 선정되어 그 사업 대상지로 원봉계 마을이 결정되면서부터였다. 그 슬로건은 ‘문화가 있는 원봉계 마을 가꾸기’로 정했다.

원봉계의 마을 만들기 사업은 여러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먼저 마을 문화 개선 사업으로 마을 회관 문화 교실을 개설하고, 마을 문화 자원을 조사·수집하며, 마을 생활 문화 공동체 의식 변화 특강을 진행한다. 또 매년 추석 전날에는 ‘마을 축제 한마당’을 개최하여 고향을 방문한 출향인들을 환영하고 주민들의 결속력을 다지는 시간을 갖고 있다. 마을 회관을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여 방문객에게 제공하기도 한다.

이어서 세시 풍속 되살리기 사업은 산업화 이후 잊고 살아온 마을 고유의 세시 풍속을 절기마다 지켜 행함으로써 앞으로 계승해 가고자 하는 것이 목표다. 오월 단오, 유월 유두, 칠월 백중, 동지 등의 절기별 행사와 함께 성황단을 조성하여 그동안 중단되어 왔던 동신제도 부활시키고자 한다.

끝으로 문화 동아리 육성 사업으로, 주민의 대다수인 노년층의 여가 활동을 돕고자 한다. 현재 풍물패, 희망 하모니카반, 어르신 노래 합창반, 짚풀 공예반, 장승 목공예반 등이 운영되고 있으며, 거창 생활 문화제에 초청 공연을 하는 등 크고 작은 성과도 있었다. 더불어 어르신 문화 탐방, 선진지 견학 등 여행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며, 사과 따기 체험 및 판매 행사도 진행하는 등 일상에서부터 생활 문화 공동체를 구현하고 있다.

이상의 활동들 외에도 앞으로 마을 박물관, 마을 인물사 등도 계획 중이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일지라도 소수의 의욕만으로는 불가능했을 터. 원봉계 마을 만들기의 성공 비결로는 역시 주민들의 적극적 협조를 꼽았다. 사업 전과 후 마을 분위기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물어보니, 그저 군이나 타 면으로부터 부러움을 사고 있다는 말만 전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던가. 마을 회관의 문화 교실은 오늘도 그 열기가 뜨겁다.

[마을 공동체, 희망이 있다]

한때 젊은 층의 이주로 활력을 잃어 가던 원봉계 마을이 ‘해따지 사과’라는 소득원을 마련한 이후 출향자들의 귀농과 주민들의 열의로 조금씩 과거의 정답던 공동체를 복원해 가고 있다. 특히 300년 전통의 옛 마을과 정책 이주로 근래에 조성된 새 마을이 이질감을 극복하고 하나의 생활 문화 공동체를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원봉계 마을 만들기의 성과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이는 가족 해체와 공동체 및 소통의 부재로 끝없이 몰락해 가는 최근 우리 사회에 하나의 대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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