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902
한자 金濩
영어공식명칭 Kimho
분야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일부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심옥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4년연표보기 - 김호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김호 체포
몰년 시기/일시 1930년 2월연표보기 - 김호 사망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거창 3·1 만세 운동의 5인 대표자 중 1인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거창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1919년 3월 21일 가조면 석강리의 지역 주민들이 정자나무 아래에 모여 거창 3·1 만세 운동을 논의하여, 3월 22일 거창읍 장날 거사를 결정했다. 그 과정에서 대표자와 5인의 책임 대표를 선출했다. 김호는 책임 대표 5인[오문현, 어명철, 최영순, 김채환, 김호] 중 한 명이다. 당시 지방 선비로 존경을 받았으며 만세 운동을 주도했지만, 사전 계획 정보가 누설되면서 핵심 인물들은 거창 헌병 분대의 일본 헌병에 의해 고문 뒤 수감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가조면·가북면 주민 3,000여 명은 일본 헌병을 향해 돌진하며 만세 시위를 하면서 확산되었다.

[가계]

1919년 3·1 운동 당시 아들 김채환과 함께 만세 시위, 군중 동원을 주도했다.

[활동 사항]

독립운동가 김호는 거창 지방에서 재력과 세력이 있는 선비로 추앙을 받아 왔던 인물이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뒤, 지역 유림과 함께 만세 운동을 결의하고 3월 22일 거창 장날에 봉기를 하기로 약속했다. 그 과정에서 5인의 핵심 주도 인물에 포함된다. 장날 아침 독립 만세를 외치며 일본 헌병 분대를 습격할 것을 계획했지만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면서 핵심 인물은 거창 헌병 분대의 일본 헌병에 의해 끌려가서 취조를 당했다. 이를 계기로 가조·가북의 주민 3,000여 명은 만세 시위를 했고, 일본 헌병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체포를 당한 뒤, 김호는 고문과 취조를 받았고 재판에 회부되어 부산 지방 법원 거창 지원에서 보안법 위반 행위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고, 진주 감옥에서 1년을 복역했다. 출옥 이후에는 옥고 후유증에 시달렸으며, 1930년 2월 영면하였다.

[묘소]

묘소는 거창군 가조면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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