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894
한자 文泰洙
이칭/별칭 문태서(文泰瑞)/문태현(文泰鉉)/의재(義齋)/봉진(鳳珍)
분야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가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0년 3월 16일연표보기 - 문태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6년 - 문태수 원통사를 근거지로 의병 거병
활동 시기/일시 1907년 10월 - 문태수 경상남도 안의군, 거창군 월성에서 결전
활동 시기/일시 1907년 12월 - 문태수 호남 창의대장 자격으로 전국 의병 연합 전선 구축 모의
활동 시기/일시 1911년 8월 - 문태수 일본 경찰에 체포
몰년 시기/일시 1913년 2월연표보기 - 문태수 자결
추모 시기/일시 1963년연표보기 - 문태수 건국 훈장 대통령장 추서
출생지 문태수 출생지 -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장구지동
묘소 문태수 묘소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성격 의병장
성별
대표 경력 호남 창의대장

[정의]

개항기 거창 덕유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병장.

[개설]

문태수(文泰洙)[1880~1913]는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출신의 의병장으로, 1906년 이후 덕유산을 중심으로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1908년 덕유산 의병 연합 부대를 조직하고, 경부선 이원역을 공격하는 등 활발한 의병 활동을 하였다.

[가계]

문태수의 본관은 남평 문씨(南平文氏)로, 문익점(文益漸)의 23세손이다. 아버지는 문병현(文炳鉉), 어머니는 밀양 박씨(密陽朴氏)이다.

[활동 사항]

문태수는 1880년 3월 16일 경상남도 안의군[현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남덕유산 자락에 있는 장구지동(藏龜池洞)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태현(泰鉉)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의분을 참지 못한 문태수는 서울의 최익현(崔益鉉)을 찾아가서 의병 활동을 같이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듬해 안의로 내려온 문태수는 처음 6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영각사에서 훈련하고 남덕유산 북쪽 산 너머의 원통사로 들어갔다. 원통사는 무주와 장수, 거창과 함양의 경계에 있는 사찰로 의병 활동의 근거지로 삼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곳에서 기회를 엿보던 문태수는 일본군 5명이 근처를 지나간다는 첩보를 접수하고, 농민을 가장하여 일본군에게 접근해서 총기를 빼앗고 사살하였다. 이것이 문태수가 한 의병 전쟁의 시작이었다. 그 후 9월경에는 장수 양악에서 박춘실(朴春實)을 만나 박춘실을 선봉장으로 삼고 계속 전투를 하면서 팔공산으로 들어갔다.

1906년 9월 17일(음)에는 장수에 주둔한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여 다수를 사살하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박수문(朴守文), 전성범(全成範)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들이 합류하였고, 문태수는 이 의병진을 ‘호남 의병단’이라 명명하고 총참모 지휘장이 되었다.

1907년 1월에는 무주 부남면 고창곡으로 일본군을 유도, 습격하여 40여 명을 사살하고 총기 50여 자루를 빼앗았다. 10월 7일에는 의병 300여 명을 인솔하여 안의 심진동에서 일본군 30여 명을 섬멸하였고, 다음날은 거창 월성에서 일본군과 혈전을 벌였다. 그해 12월 양주에서 각 도의 의병진이 모여 전국 의병대의 연합 전선 구축을 모의할 때, 문태수는 호남 창의대장으로 추대되어 1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참석했다. 그러나 일을 주도했던 이인영(李麟榮) 아버지의 사망으로 서울 진격 계획이 무산되었고, 문태수는 다시 근거지 덕유산으로 복귀하였다.

1908년 2월 28일, 6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주재소를 습격하여 교전하던 중, 일본군에게 체포되었으나 곧 탈출하였다. 4월에는 150여 명을 이끌고 장수읍을 공격하여 총기 등을 획득하였고 주재소와 군아(郡衙) 등을 불태웠다. 이어 1909년 1월에는 지례군 소재 대덕산[현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에서 안의군 방면으로 의병진을 이동시켰고, 3월 무렵에는 거창군 북상면 월성에서 전성범, 박춘실, 유종환(兪宗煥) 등의 의병장과 더불어 일본군에 항전하기도 했다. 4월 24일에는 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용담군[1914년 진안군에 합쳐짐] 이동면 장전리를 공격하였고, 10월 30일에는 경부선 이원역을 습격해 방화하고 일본군 3명을 포로로 잡았다. 11월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영동, 옥천, 청산, 금산 등에서 항일전을 벌여 적군을 다수 사살하고 총기를 노획하였다.

1911년 여름, 8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장수 헌병대를 습격하여 치열한 격전 끝에 헌병 10여 명을 사살하고 무기도 노획하여 덕유산 원통사로 회군하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많은 희생자를 내었고, 문태수는 가까스로 탈출하였다. 이후 덕유산에 몸을 감추었던 문태수는 1911년 8월 17일 추석을 맞이하여 고향을 방문하러 잠시 마을로 내려갔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이후 1913년 2월 4일 경성 감옥에서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묘소]

국립 서울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문태수의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에 문태수에게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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