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중룡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847
한자 柳仲龍
영어공식명칭 Yoo Jungryong
이칭/별칭 여견(汝見),어적산인(漁適散人)
분야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8년연표보기 - 유중룡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82년 - 유중룡 진사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유중룡 임진왜란 때 의병 거병
활동 시기/일시 1600년 - 유중룡 문과 별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02년 - 유중룡 성현도 찰방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03년 - 유중룡 예조 좌랑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04년 - 유중룡 충청도 도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07년 - 유중룡 예조 정랑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11년 - 유중룡 경상도 도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12년 - 유중룡 사헌부 장령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13년 - 유중룡 금산 군수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23년 - 유중룡 문과 중시 장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23년 - 유중룡 홍문관 수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26년 - 유중룡 홍문관 교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27년 - 유중룡 성균관 사성 임명
몰년 시기/일시 1635년연표보기 - 유중룡 사망
출생지 유중룡 출생지 -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묘소|단소 유중룡 묘소 -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무릉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문화
대표 관직|경력 성균관 사성

[정의]

조선 후기 거창 출신의 문신.

[가계]

유중룡(柳仲龍)[1558~1635]의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여견(汝見), 호는 어적산인(漁適散人)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용양위 사직(龍驤衛司直)을 지낸 유정손(柳正孫), 할아버지는 증 공조 참의(贈工曹參議) 유하(柳賀)이다. 아버지는 증 좌승지(贈左承旨) 유유춘(柳有春), 어머니는 부장(部將)을 지낸 경지(慶祉)의 딸 청주 경씨(淸州慶氏)이다. 유중룡의 부인은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낸 박광후(朴光後)의 딸 순천 박씨(順天朴氏), 홍문관 저작(弘文館著作)을 지낸 도희령(都希齡)의 딸 팔거 도씨(八莒都氏), 증 한성부 우윤(贈漢城府右尹) 이구(李衢)의 딸 인천 이씨(仁川李氏)다. 유중룡의 집안은 증조할아버지 유정손 때 처음으로 경상도 거창현에 정착하였다.

[활동 사항]

유중룡은 1558년(명종 13) 경상도 거창현 무등곡(無等谷)[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일대]에서 출생하였으며, 오건(吳健)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1582년(선조 15) 진사시에 급제하였는데, 같은 해 급제한 정경세(鄭經世)·이전(李㙉)·이준(李埈)과는 평생 교유하며 도의(道義)를 맺었다. 그 외에도 유중룡오운(吳澐)·이대기(李大期)·박이장(朴而章)·이후경(李後慶)·문려(文勵)·윤경남(尹景男)·변혼(卞渾)·권치원(權致遠)·송군옥(宋君沃)·노경복(盧景福)·조응인(曺應仁)·정온(鄭蘊)·유희춘(柳希春)·오장(吳長)·박수종(朴壽宗) 등의 명현들과 교유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중룡문위(文緯)·박성(朴惺) 등 8인과 함께 발문(發文)하고 의병을 일으키기로 약속하였다. 그리고 김면(金沔) 진중(陣中)에 합류하였고, 이후 우현(牛峴)과 상암(箱巖) 등 여러 요충지에서 왜적을 물리쳐 거창현을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막았다. 1593년(선조 26) 김면이 진중에서 세상을 떠나자 유중룡은 직접 호상(護喪)하였다. 그리고 이해 여름 아우 유계룡(柳季龍)과 함께 곽재우(郭再祐)의 진중에 들어가 왜적을 물리쳤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곽재우와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소재]에 들어가 전략을 논의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2년 뒤인 1600년(선조 33) 유중룡은 문과 별시에 급제한 후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에 성환도 찰방(成歡道察訪), 1602년(선조 35) 성현도 찰방(省峴道察訪), 1603년(선조 36) 예조 좌랑(禮曹佐郞), 1604년(선조 37) 충청도 도사(忠淸道都事)에 차례로 임명되었고, 전적(典籍)과 사예(司藝)를 거쳐 1607년(선조 40) 예조 정랑(禮曹 正郞)이 되었다. 1611년(광해군 3)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 1612년(광해군 4)에는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올랐고, 1613년(광해군 5) 금산군수(金山郡守)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광해군 동안 정국이 혼란해지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정권이 바뀐 후, 문과 중시(重試)가 거행되었는데, 유중룡도 응시해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에 특별히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되었다. 1626년(인조 4) 홍문관 교리(校理)를 거쳐, 1627년(인조 5)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올랐다. 그러나 유중룡의 나이가 이미 70세에 이르렀는지라,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여생을 보냈다.

[학문과 저술]

유중룡의 문집으로는 3권 1책의 『어적집(漁適集)』이 전한다.

[묘소]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무릉리 월곡(月谷)유중룡의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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