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랑 대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806
한자 希朗 大師
영어공식명칭 Huirang Daesa
이칭/별칭 희랑 조사(希朗祖師)
분야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889년연표보기 - 희랑 대사 출생
몰년 시기/일시 966년연표보기 - 희랑 대사 입적
출생지 희랑 대사 출생지 - 경상남도 거창군 주상면 성기리
활동지 희랑 대사 활동지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 해인사
성격 승려
성별

[정의]

남북국 시대 거창 출신의 신라 승려.

[가계]

합천 해인사(海印寺)에 전해지고 있는 「가야산 해인사 고적(伽倻山海印寺古蹟)」에 따르면, 희랑 대사(希朗大師)는 889년(신라 진성왕 3) 출생, 966년(고려 광종 17) 입적(入寂), 속성(俗姓)은 주씨(朱氏) 혹은 유씨(兪氏)라고 기록되어 있다.

[활동 사항]

「가야산 해인사 고적」에는 희랑 대사가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주상면 성기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5세 때 해인사에 출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희랑 대사의 행적은 소략하나, 고려 화엄 불교의 대가 균여(均如)[917~973]의 『균여전(均如傳)』 수록 「입의정종분(立義定宗分)」을 통해 희랑 대사의 위상을 살펴 볼 수 있다. 『균여전』에 수록된 희랑 대사의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균여는 북악(北岳)의 법손(法孫)이다. 옛날 신라 말기 가야산 해인사에 두 분의 화엄종(華嚴宗) 대가가 있었다. 한 분은 관혜(觀惠)로 후백제 견훤의 복전(福田)이 되었고, 한 분은 희랑으로 고려 태조 왕건의 복전이었다. 이로 인해 관혜희랑은 각기 화엄의 한 일파를 형성하니, 세상 사람들은 관혜의 법문을 남악파(南岳派)라 부르고, 희랑의 법문을 북악파(北岳派)라고 불렀다."

남악파의 북악파의 쟁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대 강력한 정치 세력의 후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희랑 대사의 북악파는 왕건의 후원을 받았기에 후삼국이 통일된 후에도, 그 위상이 지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하여 「가야산 해인사 고적」에서는 왕건희랑 대사에게 500결의 토지를 하사했다고 나타나 있다.

한편, 최치원(崔致遠)은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에 해당하는 천령군 태수(天嶺郡太守)로 있으면서 해인사에 있던 희랑 대사에게 시를 지어 주었다. 이때 최치원이 지은 시 6수가 『고운집(孤雲集)』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에서 최치원희랑 대사를 부처와 보살에 비유하며 극찬하였다.

[상훈과 추모]

합천 해인사에 ‘합천 해인사 건칠 희랑 대사 좌상(陜川海印寺乾漆希朗大師坐像)’[보물 제999호]이 전하고 있다. 이것은 희랑 대사의 진영상(眞影像)으로 10세기 중반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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