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756
한자 居昌 牛脊峴 戰鬪地
영어공식명칭 Geochang Woocheokhyeon Battlefield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산포리 1967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정시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건립 시기/일시 1592년 - 임진왜란 초기 왜군 장수 고바야가와 전투 발발
현 소재지 거창 우척현 전투지 -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산포리 1967 지도보기
성격 전적지
관련 인물 김면(金沔)|고바야가와[小早川]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산포리와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대리 사이의 고개 일원의 조선 시대 임진왜란 전적지.

[개설]

임진왜란 초기에 송암(松巖) 김면(金沔)[1541~1593] 휘하 2천 명의 의병은 거창군의 가북면, 웅양면, 고제면까지 우두령을 중심으로 하는 도계 분수령 일대의 요소에 장병을 배치하여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지례를 공략한 고바야가와[小早川] 휘하의 왜적은 경상 우도 낙동강 서부와 호남의 동북부를 침략하기 위해 1592년 7월 10일 께 지금의 우두령우척현을 넘으려 하였다. 천오백 명을 헤아리는 적의 군세는 각색 기치를 휘날리면서 위세 좋게 진군하여 우두령 북쪽 기슭에 이르러 대열을 산개하여 앞 다투어 능선으로 기어올랐지만 매복했던 아군이 일시에 꽹과리, 징, 북소리와 함께 함성을 지르면서 노도처럼 밀고 내려가니 적들은 김천으로 달아났다. 근래에 세운 전적비문에 따르면 우척현 전투는 산악전의 큰 전투로 산중 지리에 밝은 산척의 전공이 컸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김면은 선산의 적을 공격할 준비를 하다가 진중에서 순절하였다. 임종할 때 ‘지지유국 부지유신(只知有國 不知有身)’이라 하였으며, 이는 ‘오직 나라만을 생각했고 내 몸을 생각한 적이 없었다.’고 하였다. 왕조실록에는 왜병이 지례에서 거창에 침범하자 의병장 김면이 격퇴시켰다라고 했으며, 함양의 선비 정경운이 쓴 『고대일록(孤臺日錄)』에는 산척들이 활약한 기록을 볼 수 있다.

[건립 경위]

임진왜란 이후 기록으로 전해오던 이곳을 정비하여 2015년 9월 9일에 송암 김면 장군 후원회에서 임진왜란 구국공신 의병도대장 김면 장군 전적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김면의 가계부터 나라를 위해 창의한 사실과 임진왜란 초기의 전세, 적을 물리친 내역을 적었으며 우척현 전투와 김천[김산]의 진중에서 순국한 내용을 새겨 놓았다.

[위치]

임진왜란 구국공신 의병도대장 김면 장군 전적비는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산포리 1967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형태]

전적지는 우두령을 중심으로 하여 동으로는 가북면까지의 능선과 서쪽으로는 봉우산과 하성을 포함하여 고제면까지 광범위하게 도경계의 험준한 능선이다. 지례에서 거창을 오는 길목 험지를 의병들이 활용했다.

[현황]

임진왜란 전투지인 우두령은 이전에는 거창과 김천[김산] 사이의 국도가 지나갔으나 새길이 우회하면서 지방도로 되었다. 아직까지도 차량들이 다니는 데는 별로 불편함이 없다. 협곡으로 된 지형 지물을 이용하여 왜적을 무찌른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초기에 의병들이 일어나서 지형 지물을 활용하여 왜적을 무찔렀으며, 평소 소외되었던 계층까지도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함께 싸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유적지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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