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670
한자 居昌滿月堂
영어공식명칭 Geochang Manwoldang
이칭/별칭 팔완당(八玩堂)
분야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덕유월성로 2279-10[농산리 314]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권순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66년연표보기 - 거창만월당 창건
개축|증축 시기/일시 1786년 - 거창만월당 중건
문화재 지정 일시 2001년 12월 20일연표보기 - 거창만월당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70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거창만월당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개축|증축 시기/일시 2005년 - 거창만월당 대문채 보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2007년 - 거창만월당 대문채 전면 해체 보수
현 소재지 거창만월당 -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 314 지도보기
원소재지 팔완당 - 경상남도 거창군 고제면 농산리 204번지 지도보기
성격 정자|재실|문중 서원
양식 한식 와가[홑처마 맞배지붕]
정면 칸수 4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진양 정씨 은열공손파 종중
관리자 진양 정씨 은열공손파 종중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정의]

만월당 정종주가 1614년에 건립한 건물로 멸실되었다가 1786년에 중건된 가옥.

[개설]

거창만월당의 정면 동편에 ‘만월당’이라는 편액 외에도 정면 서편에 ‘팔완당’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만월당정종주(鄭宗周)[1573~1653]가 현재의 자리에 건립하였지만 팔완당은 만월당의 조부인 팔완당 정몽서(鄭夢瑞)가 16세기 중엽에 건립한 건물로 건립 장소는 현재의 터가 아니라 남쪽에 위치한 경상남도 거창군 고제면 농산리 204번지이다. 팔완당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만월당도 멸실된 것을 1786년(정조 10)에 후손들이 만월당 터에 각각의 건물을 중건하지 못하고 하나의 건물로 합건(合建)하여 중건하였다. 그래서 당호가 2개가 되었다. 합건된 이후 건물의 용도는 두 선생을 기리기 위한 재실로 사용되었지만, 2007년 사당인 효우사가 건립되어 문중 서원으로 발전하였다. 팔완당과 만월당의 최초의 기능은 입지, 건립 배경, 조경 등을 보아 정자로 추정되며, 이후 정자의 재실 기능이 부가된 것으로 보인다.

[위치]

거창만월당은 거창군의 북서쪽에 있는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에 있으며, 위천소정천이 합류되는 곡저 평야이다. 북쪽에는 덕유산[1,614m], 동쪽에는 호음산[930m], 남서쪽에는 금원산[1,353m] 같은 높은 산들에 둘러싸여 있다. 국도 37호선지방도 1001호선 교차되는 삼거리에서 국도 37호선을 월성 방향으로 가면 북상교를 건너 약 120m를 가면 오른쪽에 만월당이 있다. 주변에는 은진 임씨 집성촌이 있으며, 이 집성촌 안에는 갈천 서당[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5호], 서간 소루[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252호]가 있다.

[변천]

1786년(정조 10)에 중건된 거창만월당은 이곡의 형태가 조선 시대 후기의 양식이 보이고 있어, 이 무렵 대대적인 중수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 2005년에 대문채 보수, 2007년에 전면 해체 보수 공사가 있었다. 2001년 12월 20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7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형태]

거창만월당의 정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평면은 중앙에 마루 2칸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1칸씩 배치한 중당 협실형이며 정면과 배면에 쪽마루를 설치하였다. 정면의 쪽마루에는 난간을 설치하여 누각의 이미지를 나타내었다. 청방간에는 분합문[주로 대청과 방 사이 또는 대청 앞쪽에 다는 네 쪽 문]을 설치하지 않아 공간의 변화가 적은 것이 특징이다. 기단은 자연석으로 외벌대로 쌓았으며 초석은 자연석 덤벙 주초이고 기둥은 모두 둥근 기둥을 사용하였다. 공포 양식은 초익공 형식이며 결구 방법은 기둥 위에 사괘를 틀고 보아지[기둥머리에 끼워 보의 짜임새를 보강하는 짧은 부재]와 창방을 결구한 다음 주두를 올렸다. 이 주두 위에 보를 놓고 장여와 도리를 얹어 결구하였으며 장여와 창방 사이에는 소로를 끼워 넣었다. 보아지의 형태는 외부는 만개한 연꽃 모양으로 초각하였고 내부에는 꽃봉오리 모양으로 장식하였다. 초익공은 보머리에 붙여 놓았는데, 봉두를 초각해 놓았다. 상부 가구는 도리가 다섯 개인 오량가로 종보[대들보 위의 동자기둥 또는 고주(高柱)에 얹히어 중도리와 마룻대를 받치는 들보] 위에는 동자 대공[들보 위에 세워서 마룻보를 받치는 짧은 기둥]을 놓고 중도리를 올렸고 종보 위에는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지지하였다.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이며 기와는 한식 기와를 사용하였는데 암수막새를 사용하였다.

[현황]

거창만월당은 거의 평지인 대지에 남향하여 있으며, 정면에는 원형의 연못이 있고 정당의 서남쪽에 대문채가 모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대문채 남쪽에는 정용의 유적비가 배치되어 있으며, 대문채의 서쪽 바깥에는 2007년에 건립한 효우사가 있다.

[의의와 평가]

거창만월당을 건립한 정종주는 학문이 높아 동계 정온과 교유하였으며, 숙부와 친형들은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창의하여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하였다. 이러한 애국 정신을 살필 수 있는 건물이다. 만월당의 건축 양식은 봉두를 장식한 익공 양식으로 위계를 높게 처리하였고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또한 건물의 성격도 처음에는 정자로 건립하여 중건하면서 재실의 기능이 부가되었고 최근에는 사당이 건립되어 문중 서원으로 발전하여 시대적 변화 양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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