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652
한자 居昌東湖里李氏古家
영어공식명칭 Lee Clan's Old House in Dongho-ri, Geochang
분야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동호1길 217[동호리 848]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호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30년경연표보기 - 거창 동호리 이씨고가 건립
문화재 지정 일시 1985년 1월 23일연표보기 - 거창 동호리 이씨고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22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거창 동호리 이씨고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현 소재지 거창 동호리 이씨고가 -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동호리 848 지도보기
원소재지 거창 동호리 이씨고가 -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동호리 848
성격 고택
소유자 이응진
관리자 이응진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정의]

조선 후기에 지은 거창 지역 양반 가옥.

[개설]

1830년에 지은 거창 지역 양반 사대부 가옥이다. 건물은 안채와 곳간채, 사랑채, 중사랑채, 대문채 등 5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정한 형식에 치우치지 않고 남부 지방 민가의 실용적인 특징을 잘 나타낸다. 안채와 사랑채는 팔작지붕 양식이고, 곳간채와 중문채는 맞배지붕 형태이며 대문채는 솟을대문으로 되어 있다. 사랑채 당호(堂號)인 ‘동호재(東湖齋)’는 집을 지은 이진악(李鎭岳)의 할아버지 이지유(李之裕)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위치]

거창 동호리 이씨고가거창읍에서 북으로 13㎞ 떨어진 웅양면 동호리에 자리 잡고 있다. 웅양면사무소에서 웅양로를 따라 남으로 내려오다 좌회전하여 동호1길로 들어서서 계속 들어오면 동호 마을이 나오고, 이씨 고가는 마을 동측 끝부분 완만한 경사지에 남향하고 있다.

[변천]

거창 동호리 이씨고가는 19세기 초 순조 시기에 진사 이지유가 이곳에 터를 잡고 집을 지은 것이 시초이다. 지금의 동호재는 손자 이진악이 1830년경에 새로 지은 것이다.

[형태]

건물의 배치를 살펴보면, 대지 안쪽 높은 곳에 안채를 서쪽을 바라 보게 짓고, 아래 낮은 곳에다 사랑채를 남향으로 건축했다. 이밖에 안채 정면에 곳간채, 오른편[북]에 방앗간채를 튼ㄷ자형으로 배치하고, 안마당 남쪽에 사랑채와 중사랑채를 나란히 배치한 형태로 안마당 중심으로 집약적인 건물 배치를 잘 보여 준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1.5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집이다. 평면은 좌측부터 정지, 안방, 대청, 작은방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앞쪽에는 길게 툇마루가 놓여 있다. 안채는 장여를 사용하여 꾸민 장여 수장집이며, 상부 가구는 간략한 구조의 삼량가이다.

사랑채 영역은 큰사랑채와 중사랑채로 구성되며, 두 건물은 남향하고 있다. 사랑채 앞쪽에는 대문채가 배치되어 있다. 큰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집이다. 평면은 중앙에 사랑방을 두고 좌우에 사랑마루와 가묘방을 각각 둔 형태이다. 각 실(室)의 앞에는 툇마루가 놓여 있다. 평면 형태로 보면 중앙의 사랑방이 마치 돌출된 것처럼 보이나 이는 좌우에 개방된 마루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사랑방의 좌측에 놓인 작은 방은 위패를 봉안한 가묘방이며, 우측 온돌방은 상례(喪禮) 때 빈소방으로 사용된다. 사랑채의 규모가 작음에도 공간 구성을 유교적 의례를 행하기 적합하게 구성했다는 점에 큰 특징이 있다.

사랑채의 정면 좌측에서 뒤로 치우쳐 있는 중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집이다. 평면은 좌측부터 중사랑방 2칸과 중문 1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중문을 통해 비로소 안채와 안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다. 대문채는 정면 5칸의 솟을대문 형식으로, 가운데 솟을대문 좌우에 행랑방과 광을 둔 형태이다.

[현황]

거창 동호리 이씨고가는 1985년 1월 23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2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거창 동호리 이씨고가의 정침인 안채는 마을의 지형 지세에 따라 서향으로 짓되, 사랑채는 이와 무관하게 남향으로 건축했다. 특히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곳간채, 방앗간채를 기능적으로 배치한 것은 일정한 법식에 얽매이지 않고 생활의 편리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건축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안채에 비해 작은 사랑채를 짓고 빈소방과 가묘방을 구분하여 시설한 것은 조선 후기 양반 사대부들이 유교 의례의 실행을 중시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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