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농민전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543
한자 -年農民戰爭
영어공식명칭 Peasant Revolution in 1894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하지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4년연표보기 - 1894년 농민 전쟁에 거창 지역의 농민 합세
종결 시기/일시 1895년연표보기 - 1894년 농민 전쟁, 거창 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제압

[정의]

1894년부터 1895년 사이에 경상남도 거창 지역의 가조 등지에서 일어난 반봉건 반외세 농민 봉기.

[개설]

1894년 농민 전쟁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을 중심으로 농민, 도시민, 소상인, 몰락 양반, 이서 등 봉건 사회 해체 과정에서 몰락한 계층이 광범하게 참여한 반봉건 반외세 근대화 운동이다. 경상남도 거창 지역에서는 안의와 가조 등지에서 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역사적 배경]

조선 후기 중세적인 지배 체제의 모순으로 삼정의 문란은 더욱 심해졌다. 더불어 개항 이후 외국의 공산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국내 수공업은 위축되었고 쌀은 일본으로 빠져나가 쌀값이 뛰고 식량은 부족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빈농은 물론 영세 수공업자와 소상인 등 백성들의 삶은 날로 어려워지고, 지주와 대상인 등은 쌀 수출을 통해 부를 쌓아 토지를 늘렸다. 이에 농민을 비롯한 백성들은 정부의 조세 수탈, 지주층의 지대 수탈 및 외세의 경제 침탈에 맞서며 전국 여기 저기에서 봉기하기에 이르렀다.

[경과]

1894년 농민 전쟁은 1894년 1월에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으로 촉발된 ‘고부 민란’이 발단이 되었다. 고부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가 농민들을 혹독하게 탄압하자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농민군 지도부는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으로 옮겨 민란 이후 해산하였던 농민군을 재조직하고 ‘무장 포고문’을 발표하면서 재봉기를 선언하였다. 1894년 3월 하순 농민군은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에 모여 4대 강령과 농민 봉기를 알리는 격문을 발표한 뒤 고부, 태인, 부안을 차례로 점령하고 황토현에서 전라 감영군을 대파하였다. 이후 사기가 충천한 농민군은 남진하여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농민군의 전주성 함락 소식에 놀란 정부는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으며, 청나라 군대가 조선으로 들어오자 일본은 텐진 조약을 구실로 군대를 조선으로 보냈다. 이에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의 철병을 요구하며 농민군과 정부는 휴전을 맺었다. 이른바 ‘전주 화약’이다. 전주 화약 이후 농민군은 각 군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을 추진하였다.

1894년 6월 하순경 전라북도 남원에 주둔하고 있던 농민군은 경상남도로 진출하기 위해 운봉을 거쳐 함양을 공략하고 이어 안의로 들어갔다. 이에 순영(巡營)[감사가 정무를 보던 관아]에서는 영관 최응규로 하여금 포수 100명을 데리고 안의로 떠나도록 하였다. 안의 현감 조원식이 농민군을 환영하며 융숭하게 대접하여, 농민군을 취하여 잠들게 한 다음 농민군을 섬멸하였다. 이후에도 농민군은 경상남도로 들어오는 길목인 운봉을 몇 차례 공격했지만 운봉을 수비하던 전 주서(前注書) 박봉양의 민보군에 막혀 모두 실패하였다. 이 무렵 경상남도 거창군 내에서는 가조면 석강리 출신의 이은우가 가조와 가북을 중심으로 거창 각지에서 운집한 농민군 수백 명을 이끌고 거창읍으로 진격하다가 무기의 부족과 훈련의 미비로 실패하여 사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한편 농민군의 진압을 구실로 조선으로 진출한 일본은 이를 계기로 청나라를 물리치고 조선에서 지위를 굳건히 하기로 하였다. 일본은 1894년 7월 중순 병력을 동원하여 경복궁을 무력으로 장악하고, 친일 내각을 출범시켜 갑오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청일 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위기 의식을 느낀 농민군은 1894년 9월 중순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에서 다시 봉기하였고, 거창을 비롯한 경상남도 서부 지역에서도 이와 연대한 농민군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이렇게 되자 정부에서는 대구판관 지석영을 영남 토포사로 삼아 낙동강 좌우 지역의 농민군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거창 부사 정관섭에게는 거창, 안의, 함양, 산청, 단성, 삼가, 합천, 지례, 진주, 하동, 의령, 남해의 12개 고을을 관할하게 하였다.

1894년 11월 초 일본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서울로 올라 가려던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정부군과 일본군 연합군에 맞서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하지만 화력의 열세로 패배하고 말았으며, 이후 농민군 주력은 전주, 태인으로 후퇴하여 해산하였다. 진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남도 서부 지역의 농민군은 곤양의 금오산과 하동의 고성 산성에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1개 중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패퇴하였다. 이 전투 이후 경상남도 서부 지역 농민군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결과]

1894년 12월 농민군 수만 명이 거창으로 향한다는 첩보에 따라 경상 감사 조병호는 영관 최처규에게 남영병 100여 명을 인솔하고 고령, 합천, 거창, 고령을 순회하도록 하였다. 12월 하순 거창의 촌락을 수색하여 8명을 체포하였다. 일본군은 보병 제18대대를 경상도로 보내어 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하였으며, 12월 초 관군과 함께 무주와 진주에서 거창으로 진입하는 농민군을 막았다. 1895년 1월 상순에는 거창 지역에서 농민군을 무력 진압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반전되자 양반들은 민보군을 조직하여 농민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농민군에 가담했던 사람들의 피해는 전라도, 충청도와 함께 거창, 안의, 함양, 산청 등지에서 가장 극심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1894년의 농민 전쟁은 비록 정부와 일본군의 무력 진압으로 실패로 돌아갔지만 농민 주도의 근대 개혁 운동이자 반외세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또한 이후 농민들의 사회 개혁 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안의와 가조 등 거창 지역 내에서 확인할 수 있는 농민군의 활동상은 농민군 주력 부대의 전투가 주로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1894년 농민 전쟁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농민들의 근대 개혁 시도가 이들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음을 잘 보여 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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