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인민 유격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165
한자 慶尙南道 人民 遊擊隊
이칭/별칭 경남 빨치산,남부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은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49년 7월 초 - 경상남도 인민 유격대, 남조선 인민 유격대가 결성
설립 시기/일시 1950년 9월 29일 - 경상남도 인민 유격대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에서 결성
이전 시기/일시 1950년 10월 28일 - 경상남도 인민 유격대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운암으로 거점 이동
이전 시기/일시 1950년 11월 14일 - 경상남도 인민 유격대 덕유산 월성으로 거점 이동
이전 시기/일시 1951년 1월 25일 - 경상남도 인민 유격대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죽전리로 거점 이동
이전 시기/일시 1951년 5월 15일 - 경상남도 인민 유격대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로 거점 이동
개칭 시기/일시 1951년 7월 - 경상남도 인민 유격대 남부군 제57사단으로 재편
해체 시기/일시 1954년 10월 - 경상남도 인민 유격대 해체
최초 설립지 경상남도 인민 유격대 결성 - 경남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주소 변경 이력 경상남도 인민 유격대 이동 - 경남 함양군 휴천면 운암
주소 변경 이력 경상남도 인민 유격대 이동 - 덕유산 월성지도보기
주소 변경 이력 경상남도 인민 유격대 이동 - 경남 산청군 삼장면 죽전리
주소 변경 이력 경상남도 인민 유격대 이동 -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주소 변경 이력 경상남도 인민 유격대 재편성 - 지리산 일대
성격 북한 인민군의 전선 배후 부대
설립자 인민군 패잔병과 지방 좌익 세력

[정의]

경상남도 거창 지역에서 활동한 북한 인민군 소속 유격대.

[개설]

1950년 9월 인천 상륙 작전 성공 후 인민군 후퇴 과정에서 낙오병과 토착 좌익 세력이, 9월 29일 경상남도 인민 유격대를 결성했다. 경상남도 인민 유격대지리산, 덕유산을 중심으로 1950~1951년에 주로 활동했으며 1954년 10월에 완전히 토벌되었다. 1950년 9월 경남 인민 유격대 조직 당시 거창 지역에서 활동한 거창 중대는 27명의 대원이 있었다. 군경에 의한 토벌로 세력이 약화되자 소부대로 편제되었고, 거창 인근에서 활동한 소부대로는 신원면의 철마산과 덕갈산의 동부 소지구당, 기백산, 월봉산, 금원산, 황석산의 경남 북부 소지구당 노영호 부대, 경남도당 덕유산 소지구당 박문수 부대 등이 있었다.

1949년 7월 초 남조선 인민 유격대가 결성되었고, 북한은 약 2,400명의 유격대원을 10차에 걸쳐 남파하였으나 대대적인 토벌로 1950년 초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한국 전쟁을 기점으로 하여 이전을 구빨치, 이후를 신빨치로 구분한다. 구빨치는 남로당이 불법화되면서 주로 야산대에서 활동했고, 여순 사건 후에는 패잔병들과 합류하여 본격적인 유격대 활동을 하였다.

[설립 목적]

1951년 7월 10일 작성된 경상남도 인민 유격대 활동 보고서에서 밝히는 활동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민군의 후퇴를 조직적으로 보장한다. 둘째, 적의 침입을 받은 지역에서 인민들을 당과 정부 주위에 집결시킨다. 셋째, 적들을 인민들로부터 고립시킨다. 넷째, 유격 운동의 강화로서 당과 정권 기관, 사회단체들의 지하 활동을 보장한다. 다섯째, 원수들의 군사 행동 질서를 마비 혼란시킨다. 여섯째, 군사 후방을 교란하며 도로와 교량 등을 파괴한다. 일곱째, 적들의 집단 병력에 타격을 주어 인력 및 무기 탄약을 탈취하는 등 행정 질서를 마비시킨다.

[변천]

경상남도 인민 유격대는 1950년 9월 29일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에서 결성되었고 3개 중대와 특공대로 편제되었다. 별도로 합천, 함양, 거창, 진양, 하동, 산청 중대를 두었다. 거창 중대는 27명의 빨치산으로 구성되었다. 1950년 10월 28일 함양군 휴천면 운암으로 거점을 이동했다. 사령부는 지리산에 두었으나 1950년 11월 4일 덕유산 월성으로 거점을 옮겼다.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에 본부를 둔 303부대는 거창, 안의, 함양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1951년 1월 경상남도 인민 유격대는 거점을 다시 지리산으로 옮겨 1월 15일 산청군 삼장면 죽전리로 거점을 이동하여 4개 병단으로 재편했다. 그중 제3병단이 덕유산 아래 월성에 배치되었다. 1951년 5월 15일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로 거점을 이동했다. 경상남도 인민 유격대는 1950년부터 1951년 겨울까지 국군과 경찰의 토벌로 큰 타격을 입고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1951년 7월 경상남도 인민 유격대는 남부군의 제57사단으로 편성되어 활동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자 토벌대의 공세를 피하기 위해 소부대로 활동했다. 거창 인근에서 활동한 소부대는 신원면의 철마산과 덕갈산을 거점으로 한 동부 소지구당, 기백산을 주요 거점으로 월봉산, 금원산, 황석산 등지로 이동하며 활동한 경남 북부 소지구당 노영호 부대, 경남도당 덕유산 소지구당 박문수 부대 등이 있었다. 1954년 봄 토벌대의 공격으로 모두 와해되었다. 1954년 6월 노영호의 사망 후 북부 소지구당 부대 잔여 대원 7명이 10월 황석산에서 최후를 맞았고, 마침내 경남도당 빨치산의 활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경상남도 인민 유격대지리산, 덕유산, 황매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1950년 10월 초부터 1951년 6월 말까지 1,124차레 전투를 벌였다. 경상남도 인민 유격대의 대표적인 공세는 1950년 10월 24일의 공격이었다. 인월, 수동, 거창, 산청, 단성, 안의 등지를 일제히 기습 공격하여 인월, 단성, 안의를 점령하였고 다른 지역에서도 주요 기관을 습격하였다.

[현황]

경상남도 인민 유격대는 1954년 10월 완전히 토벌되었다.

[의의와 평가]

유격대 활동은 후방을 교란시키고 국군의 전력을 분산시킴으로써 한국 전쟁의 전체 전선에 악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유격대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국군과 경찰에 의한 비극적인 대규모 민간인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특히 거창 양민 학살 사건으로 719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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