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121
한자 山城
영어공식명칭 Fortress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구본용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에 있는 산 위에 쌓은 성

[개설]

산성(山城)은 읍성(邑城)과는 달리 순수한 군사 목적에서 축성(築城)되어 적이 칩입하면 군사와 주민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켜 적과 대치하는 곳이기 때문에 지형상 전략적 요충지인 동시에 군사적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경상남도 거창은 삼국 시대 때 가야, 신라, 백제의 접경 지역에 있었던 관계로 군사 전략적으로 요충지였기 때문에 곳곳에 산성 유적이 남아 있다. 또한 고려 시대, 조선 시대에는 사회 변혁기와 왜적을 방어하기 위한 방편으로 산성이 축성되었다. 현재 거창 지역의 산성은 20여 개소가 남아 있다. 거창 지역의 산성은 삼국 시대 때 축조된 것이 대부분이며 고려 시대 산성은 1개소, 조선 시대 산성은 6개소 정도이다. 또한 통일 신라 후반기에 세워진 정장리 토성(土城)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산성 형태이다.

[시대별 현황]

1. 삼국 시대

경상남도 거창군은 삼국 시대 전략적 요충지로 가야, 백제, 신라는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하였다. 월곡산성, 마리성[말흘 고성] 등은 삼국 시대 가야 때 쌓은 것으로도 추측되나 확실하지 않다.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산성은 신라와 백제의 쟁탈 과정에서 신라가 쌓은 것으로 파악된다. 거창 지역은 대가야에 속한 지역이었다가 대가야의 멸망으로 562년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642년 백제 의자왕이 군사를 일으켜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 신라 서부 40여 개 성을 장악하고 이어 합천 대야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663년(신라 문무왕 3) 다시 거열성을 되찾을 때까지 약 20여 년간 거창 지역은 백제의 수중에 있었다. 이 시기에 거창 지역의 산성 대부분이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대표적인 산성은 거열성·분산성·성기성·하성 등이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도 백제 부흥을 노리던 부흥군거열성을 거점으로 치열한 항전을 전개하여 신라가 3년 만에 지역을 회복할 수 있었을 정도로 거창 지역은 삼국 시대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거열성은 당나라와의 싸움에 대비하기 위해 673년(문무왕 13)에 다시 축성할 만큼 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이였으며, 거창 산성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전체적으로 거창 지역의 삼국 시대 산성은 산 정상부에 테뫼식 형태와 내탁식으로 만들어졌으며 규모는 대략 500~1,400m 내외이다.

2. 고려 시대

고려 시대 산성으로는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에 있는 만기성(萬基城)이 유일하다. 해발 460m 야산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테뫼식 석성(石城)이다. 산의 8부 능선을 감싸고 있고 외부 1열만 석축을 하고 내부는 흙으로 채웠다. 현재 동쪽 끝 지점에 성벽이 남아 있는데, 높이 약 90㎝에 7~8단 정도 남아 있다. 규격화된 정연한 돌을 사용하지 않아 전체적으로 매우 엉성한 상태이다. 만기성은 고려 말에 반씨(潘氏)들이 쌓았다고 한다. 1388년(우왕 14) 왜구 침입 때 효행으로 이름난 반전(潘腆)과 관련성이 있다. 반씨는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강동 마을에 처음 터를 잡고 집성촌을 이루었으나, 고려 말 이후 쇠퇴하였다.

3. 조선 시대

조선 시대 산성은 임진왜란 때 남평 문씨들이 쌓은 황사산성(黃沙山城)경상남도 거창군 고제면에 있는 봉화대성(烽火臺城) 터,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성곡성(城谷城) 터성산봉산성(城山峰山城), 임진왜란정유명(鄭惟明)이 쌓은 성인 용문 고성(龍門古城)경상남도 거창군 주상면 완대리 성산성(城山城) 터가 있다. 거열성과 마주 보고 있는 망덕산성운정산성도 1894년 동학 혁명 때 쌓은 성이라 하여 ‘갑오내외성’으로 불리나, 삼국 시대 산성을 다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산성은 거의 임진왜란이나 동학 혁명 때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유력 문중에서 쌓은 것으로 정형화되어 있지 않다. 중앙 정부의 방어력이 미치지 않아 자구책의 방편으로 쌓은 것으로 당대 방어 체계의 한 단면을 알 수 있다.

[분포 상황]

경상남도 거창군 관내에서 확인된 20개 산성의 위치는 주변의 분지(盆地)들과 분수계(分水界)로 연결되어 있는 거창 분지의 특수성과 관련이 있다는데, 크게 도로, 위치, 고분 포함 여부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주요 도로상의 거점 지역에 있는 것은 성기성, 월계산성, 마리성[말흘 고성], 분산성, 만기성 터, 황사산성, 월곡산성, 성재, 용문 고성 등이다. 이들 산성은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전라북도 무주군이나 경상북도 김천시 방면으로 넘어가는 도로의 좌우에 많이 있는데, 이 길들이 예로부터 한양으로 가는 주요 길목의 하나이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또 대구광역시,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을 거쳐 거창 방면으로 이동하는 길목에 다수의 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거창 지역에서 높은 곳에 있는 것은 거열성, 망덕산성, 운정산성, 용산리 성터, 하성, 성곡성 터, 성산봉 성터, 성산성 터 등이다. 한편 산성 내에 고분군이 있는 곳은 성재·마리성[말흘 고성황사산성 등이며, 성산성 터, 성곡성 터 등은 전쟁으로 인해 급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징]

거창 지역 산성은 대부분 산의 정상부를 감싸고 있는 테뫼식 형태의 산성으로, 산의 정상부를 배경으로 높은 곳에 축성된 특징을 보인다. 성을 만든 기법으로는 품(品)자형 축조 방식과 수평 줄눈 맞추기, 잔돌 끼워 넣기 수법 등이 일반적이다. 또한 황사산성과 분산성, 정장리 토성을 제외한 나머지 산성들은 대개 험준한 산을 배경으로 꼭대기에 축조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이다.

거창 지역의 산성과 관련된 지명은 성현[성재], 성령산, 성기, 할미산성, 들성, 갑오외성지, 갑오내성지, 성산, 성치[성재], 장백, 성북[잣뒤], 여성, 성산봉, 성곡[성골], 성재골, 성지 등이 전해진다. 이들 주변에는 대부분 산성 유적이 남아 있다. 후대의 임진왜란, 동학 혁명 등과 관련된 이름도 있지만, 이들 역시 앞선 시기의 것을 개축 내지 수축하여 다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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