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092
한자 家屋
영어공식명칭 House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하종한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 지역에 있는 조선 시대 전통 가옥과 근대 서민 가옥.

[개설]

거창군은 경상남도 서북단에 위치하며 남한 전체에서 볼 때 남부 지방의 중심에 있다. 행정 구역은 역사적인 시대 상황을 반영하여 여러 번의 변화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에 안의군삼가군의 일부가 편입되었고, 1972년에는 함양군 안의면의 진목리, 춘전리남상면에 편입되는 등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가 있었다. 거창군 일대에는 1,000m가 넘는 산들이 곳곳에 퍼져 있다. 이 큰 산들을 분수계로 하는 여러 하천과 강들이 흐르며 강 유역들을 중심으로 농경지가 분포한다. 연평균 기온은 12.1℃, 연평균 강수량은 1,238㎜로 연중 기후가 온화하여 가옥은 개방적인 남부 지방형으로 발달하였다. 거창 지역은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밝혀졌으며, 청동기 시대의 수혈 주거의 흔적들도 여러 곳에서 발굴되었다. 왕조 시대를 거쳐 조선 초기에 이르면 거창 지역은 하나의 학풍을 이루었던 지역으로 유학이 발달하였고, 아직도 거창에는 그 전통을 이어가는 마을과 양반들의 주거인 상류 주거는 여러 채가 남아 있다. 그러나 서민들의 주거였던 민가는 노후화와 도시화로 남아 있는 예가 거의 없어 옛 사진에서 그 형태를 찾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일제 강점기 시기 거창 지역의 서민 가옥은 개항 이후의 변화를 어느 정도 수용하였다. 네덜란드 형식 주택이나 지역에 파견된 관리들의 관사 등에서 볼 수 있다. 6·25 전쟁 때의 폭격으로 초토화되었던 거창 시장 지역에는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건립되었던 일본식 또는 서양식을 가미한 일본식의 상가형 주택들이 대거 건립되었다.

[종류 및 형태]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에 있는 거창 갈계리 임씨 고가[경상남도 민속 문화재 제9호]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효자로 이름이 높았던 갈천(葛川) 임훈(林薰)이 거처하던 곳이다. 임진왜란 이전인 1507년(중종 2)에 건립되어 조선 전기 주택의 건축 양식을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안채와 사랑채가 ‘二’자형으로 배치되고, 앞에는 대문채가, 뒤에는 좌측으로 치우쳐 사당이 놓인 배치이다. 정면 5칸, 측면 1칸인 안채는 가운데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1칸의 방, 맨 우측칸에 부엌을 들인 형태이고, 상부 가구는 도리를 세 개 쓴 3량가이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민도리집으로,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꾸몄다. 툇간을 두지 않는 조선 전기 주택의 특징을 보여 주는 예이다.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에 있는 거창 동계 종택[중요 민속 문화재 제209호]은 조선 전기의 문신 정온[1569~1641]이 태어난 집으로, 후손들이 1820년(순조 20)에 다시 짓고 정온의 신위를 사당에 모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솟을대문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ㄱ’자형의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의 안쪽으로 ‘一’자형의 안채가 자리하였다. 안채의 오른쪽에는 뜰아래채가, 왼쪽에는 곳간채가 있다. 안채의 뒷쪽에 따로 담장을 두르고 삼문을 설치한 후 사당을 세웠다. 사랑채는 누마루로 꾸미고 눈썹지붕을 설치한 점이 특이하다. 안채와 사랑채는 북부 지방 가옥의 특징인 겹집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기단은 낮고 툇마루를 높게 설치한 남부 지방 고유의 특징도 함께 띠고 있어 학술적 가치를 찾을 수 있다. 동계 종택은 조선 후기 양반 사대부 주택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거창군 웅양면 동호리에 있는 거창 동호리 이씨 고가[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22호]는 1810년(순조 10)에 이진악이 지은 주택이며 할아버지인 이지유의 호를 따서 동호재라 하였다. 동호 마을의 맨 위쪽에 남향하여 위치하고 있다. 안쪽 높은 곳에 안채 영역을 두고 낮은 곳에 사랑채 영역을 직렬로 배치하였다. 안채 영역에는 서향한 안채가 있고 우측에 방앗간채가, 안채의 맞은편에는 곳간채를 튼 'ㄷ'자형으로 배치하였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1.5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사랑채 영역은 큰사랑채와 중사랑채가 나란히 남향하여 있고 사랑채 맞은 편에는 대문채가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평면은 세 칸에 모두 방을 설치하고 방의 앞에는 각 칸에 마루를 설치하여 대청의 개념이 없다. 지역 향반으로 형식보다는 실용성을 중시하는 경향을 여기에서 볼 수 있으며, 민가의 형식이 적용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거창군 거창읍 송정리에 있는 최학영 씨 댁은 원래 전매 지청장의 관사로 쓰던 집이다. 1940년경에 지어졌으며 단층의 일식 주택으로 겹집의 형태이며, 내부 복도를 통해 연결되는 다다미방을 모두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다. 내부 복도나 내부 변소, 욕실, 창고 등에서 일본식 가옥의 특성이 보인다.

거창군 거창읍 정장리에 있는 최남식 가옥[경상남도 등록 문화재 제203호]은 잡지에서 본 네덜란드의 주택을 모방하고, 눈이 많이 오는 지역 특성을 고려하여 소유자가 직접 계획한 집이다. 최남식 가옥은 2층이며 '十'자형 평면 태로 높은 꺾인 지붕의 중간에 확장된 수평적 발코니를 삽입하여 침투를 표현하였다.

거창군 거창읍 중앙리에 있는 형제 완구 건물은 1층은 상점으로, 2층은 주거로 쓰고 있는 건물이다. 철물로 이은, 아주 가는 목재를 구조재로 쓴 건물로 기둥과 보로 가구한 후 목재널을 대어 벽체를 구성하고 시멘트로 마감한 형식이다. 지붕은 박공지붕이다.

[특징]

거창 지역은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였던 지역으로 조선 시대의 주택 중 상류층 주거들은 거주 공간이 안채와 사랑채로 확연히 구분되었으며 조선 전기 주거의 예와 후기 거의 예를 고루 살필 수 있다. 서민 가옥인 민가는 현재 전혀 남아 있지 않으나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지역 민가 대부분이 남부형의 초가였던 것이 확인된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는 관료들의 사택이나 양식 주택이 소수 건립되었으며 또한 시장을 중심으로 일본식 상가 주택들이 다수 지어졌다. 일본식 상가 주택들은 6·25 전쟁 때 초토화된 시장통에 다시 건립되어 아직까지 많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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