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086
한자 學生 運動
영어공식명칭 Student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배병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1년 5월 - 거창 공립 보통학교 149명 동맹 휴학 학생 운동 전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3년 9월 - 거창 공립 보통학교 6학년 학생 동맹 휴학 학생 운동 전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0년 11월 - 거창 공립 보통학교 6학년 학생 동맹 휴학 학생 운동 전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2년 10월 - 신원 국민학교 5·6학년 학생 동맹 휴학 학생 운동 전개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거창군 내에서, 혹은 거창 출신 인물에 의해 타 지역에서 발생한 학생들의 항일 민족 운동.

[일제 강점기 학생 운동의 경향]

일제 강점기 학생 운동은 항일 민족 운동의 한 갈래로, 합법적 결사 운동, 문화 계몽 운동, 동맹 휴학, 비밀 결사, 가두시위 등 다양한 양상을 띠며 발전하였다. 학생 운동의 본격적인 등장을 알린 것은 1920년대의 동맹 휴학 운동인데, 대체로 학원 내의 사소한 문제로부터 발단이 되어 일제의 식민지 노예 교육에 대한 규탄, 나아가 총독부 정책에 대한 비판과 민족 독립의 요구로 확대·발전하는 경향이 있었다. 흔히 1926년 6·10 학생 운동을 기점으로 삼아 그 이전은 민족주의 색채를 띤 식민지 교육에 대한 반항으로 보며, 그 이후는 사회주의의 영향 아래 식민지 자체를 부정하는 항일 민족 운동으로 승화되어 간 것으로 본다. 후자에서 1920년대의 동맹 휴학 운동은 1930년대 이후의 비밀 결사 운동으로 연결된다. 거창군은 예부터 유림의 고장이자 교육 도시로, 학생 운동의 전통도 찬란하여 그 일반적 경향을 잘 보여 준다.

[거창 지역의 동맹 휴학 운동]

거창 최초의 동맹 휴학은 1921년 5월 거창 공립 보통학교[현재 거창 초등학교]에서 일어났다. 1학년을 제외한 학생 149명 전원이 참가하였는데, 일본인 교장의 불친절과 가혹한 제재, 학교 일에 대한 무관심 등을 이유로 내세웠다. 학생들은 일본인 교장의 조선인 학생에 대한 차별 대우를 “초나라 사람이 월나라 사람을 보듯이” 한다고 표현했다. 이에 대해 학교 측은 신명준(愼命俊), 김해룡(金海龍) 2명을 퇴학시키고, 김덕수(金德守) 등 5명을 정학 처분하는 등 강력히 대응함으로써 학생들의 큰 반발을 불렀다. 재차 발생한 학생들의 동맹 휴학으로 결국 문제가 된 일본인 교장은 거창 군민들로부터 배척당하여 타지로 전근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창 공립 보통학교 일본인 교원의 조선인 학생들에 대한 차별 대우는 그 후에도 개선되지 않았다. 2년 후인 1923년 9월에도 교사 나가타 미네키치[永田峯吉]의 비교육적인 처사에 반발하며 6학년 학생 전원이 동맹 휴학을 단행하였다. 또, 1930년 11월에도 6학년 학생들이 일본인 담임 교사 이토 카즈오[一藤一夫]를 배척하여 학교와 군수, 학부모회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동맹 휴학을 벌이는 등 식민지 교육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었다.

1942년 10월에는 신원 국민학교[현재의 신원 초등학교]에서 일본인 교사의 한국인 교장 폭행 사건에 반발하여 5·6학년 학생들이 동맹 휴학을 단행하였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일제 말기 면 단위에서도 발생할 만큼 거창 지역 학생 운동의 저변이 넓고 강고하였다는 것을 이로써 확인할 수 있다.

[거창 출신 인물이 타지에서 학생 운동에 가담한 사례]

거창 출신 인물들이 학생 운동에 가담한 사례는 국내외에서 여러 건이 확인된다. 먼저 임유동(林有棟)[1990년 애국장 추서]은 북상면 갈계리 출신으로, 베이징 사범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26년 베이징에서 한인 청년회를 조직하여 집행 위원으로 활동 하는 등 항일 학생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1928년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거창읍 정장리 출신의 유몽룡(劉夢龍)[1992년 건국 포장 추서]은 전라남도 광주에서 활동한 학생 운동가이다. 1938년 광주 서중학교에 입학하여 ‘서중 독서회’를 조직하고, 1941년 이를 ‘무등회(無等會)’로 개편하여 창씨 개명·일어 상용·징병제 등에 대해 비판하고 토론하였다. 이로 인해 1942년 경찰에 체포되었고,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전사옥(全駟玉)가북면 해평리 출신으로, 1929년 진주 고등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시험지 백지 동맹 사건, 사회 사상 연구 단체 조직, 항일 투쟁 결사대 조직 등의 활동을 벌였다. 이로 인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0개월을 복역하고 퇴학당하였다. 그 후 일본 유학 중 여운형을 만나 항일 운동을 계속하였으며, 해방 후 청년 운동으로 그 활동을 이어갔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 학생 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노예 교육에 반대한 민족 운동이자 독립운동이었다. 학생들은 일본인 교장이나 교사에 대한 저항을 통해 일제의 민족 차별 교육, 황국 신민화 교육, 강압적인 교육 방식에 항거했던 것이다. 교육 현장에서 체득한 식민지 현실에 대한 인식은 비밀 결사 운동을 통해 민족 독립 운동으로 발전해 갔고, 학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청년 운동으로도 이어졌다.

거창 지역에서 발생한 거창 공립 보통학교신원 국민학교의 동맹 휴학 운동은 대체로 초기 형태인 식민지 교육에 대한 민족주의적 반항이었고, 1930년대 이후 거창 출신 인물들에 의해 타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학생 운동들은 독립운동 차원으로 확장된 비밀 결사 운동을 대표하는 사례라 하겠다. 일제 강점기 거창 지역 학생들의 이러한 애국심과 정의감은 해방 후 민주화 운동 과정에도 계승되어 4·19 혁명과 3선 개헌 반대 시위 등으로 표출되었고, 현재 ‘교육 도시 거창’의 명성에도 큰 자산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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