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082
한자 靑年 運動
영어공식명칭 Youth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선화

[정의]

일제 강점기 거창 지역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사회 변혁 운동.

[1920년대 초반 거창의 청년 운동]

거창의 청년 운동은 1919년 3·1 운동 이후 활발히 전개되었다. 1920년대 초반 청년 운동은 주로 지식인층이 주도하는 문화 계몽 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1920년 거창 지역도 마찬가지로 지역 지식인들과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300여 명이 모여 청년회를 결성하였다. 가장 먼저 확인되는 청년회는 아람 청년회이며, 이후 거창 청년회로 성장하였다. 거창 청년회 외에 거창 기독 청년회가 1920년부터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하였으며 1921년에는 위천면에서 금원 청년회가 결성되었다. 위천면금원 청년회는 마리·위천·북상 3면의 연합 청년회였다. 1920년대 초 청년회의 활동을 보면 대체로 정신적·물질적 신생활 자각이라는 목표하에 광범위한 청년층을 조직하고 계몽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청년회 활동을 보면 재외 동포 돕기, 수해 모금 운동 등을 전개하였으며 운동회, 음악회를 개최하거나 생활 개조를 주제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지역 교육에도 관심을 가지고 야학 등을 개설하여 지원하였다. 1920년대 초반의 청년 운동은 친목적이고 계몽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1920년대 중반 거창의 청년 운동]

1920년대 중반에 들어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면서 청년 운동도 그 성격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1924년 사회주의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전국적 대중 조직으로 조선 청년 총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시기 청년 운동은 민족 해방의 이념을 대중에게 확산시키고 대중을 조직화하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청년 운동의 영향하에 거창에서도 기존의 미약한 활동을 반성하면서 1925년 3월 7일 대혁신 총회를 개최하고 강령을 제정하였다. 강령은 대중 본위를 목표로 단결하자는 것으로 신진 청년을 훈련시키기 위해 독서회·강연회를 수시로 개최하며 노동자·농민 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계급 의식을 촉진하기 위해 노동 야학을 조직할 것, 국제 청년 데이를 기념할 것, 5월 1일을 ‘거창 청년 데이’로 정하고 기념할 것, 신여성 운동을 촉진하여 여자 야학회 및 강연회를 수시로 열 것, 조선 청년 동맹에 가입할 것, 각 단체와 연합해 거창 유치원을 세울 것 등을 논의하였다. 거창 청년회에서는 1925년 4월 1일부터 거창 청년 회관에서 노동 야학을 개설하고, 시민 대운동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히 활동을 해 나갔으며 8월부터는 오후 8시 거창 청년 회관에서 독서회를 열어 청년들의 의식을 고양시켰다. 1926년 8월 새로운 거창 청년 회관을 준공하였고, 1927년에는 보신 강습소를 인계하여 노동 야학을 나오고 고등과로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고등과 야학을 신설하였다. 1927년 10월 22일 신간회 거창 지회가 설립되면서 청년회에서도 신간회 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가조면에서는 1927년에 가조 청년회가 결성되어 노동 야학을 열고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가조 지역 사회 운동을 이끌었다.

1926년 정우회 선언으로 대중 운동이 정치 투쟁으로 나가는 문제가 제기되면서 청년 운동도 방향 전환 열풍이 불어왔다. 조선 청년 총동맹은 1927년 6월 집회 위원회에서 방향 전환하여 무산 청년 운동을 전민족 청년 운동으로 전선을 확대하기로 결의하였다. 신운동 방침으로 종전의 청년 단체를 해체하고 전청년을 포괄하는 군·부 청년 동맹을 조직하기로 하여 군·부 동맹 및 도 연맹의 강령과 규약을 통일하였다. 군·부 청년 동맹의 기초 조직으로 반과 지부를 두기로 하였다. 거창 지역에서도 방침에 따라 청년 단체들을 해체하고 1928년경 거창 청년 동맹을 결성하였다. 거창 청년 동맹은 지부 결성에 노력하여 1930년3월 30일 거창 청년 동맹 웅양 지부가 설립되었고, 4월 5일 거창 지부가 설립되었다. 이 외에 위천, 가조에서도 지부가 결성된 것으로 보인다. 거창 청년 동맹에서는 노동 운동과 소년 운동을 지원하고 빈민 아동에게 무상 교육을 실시한 보성 학원을 계속 지원하였다. 당시 거창 청년 동맹은 사회주의 색채가 강하였고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1920년대 후반 이후 거창의 청년 운동]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가 되면서 민족 운동의 주·객관적 정세가 변하고 국제 혁명 운동의 노선이 좌선회함에 따라 청년 운동을 계급 운동의 일환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그 결과 1930년과 1931년에 조선 청년 총동맹은 해소론에 휩싸였다. 조선 청년 총동맹이 청년 운동의 중추 기관으로서의 위상을 상실하게 된 데다 이 시기에 일제의 가혹한 탄압이 가중됨에 따라 청년 운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따라서 1931년 5월 이후 조선 청년 총동맹은 해산의 수순을 거치게 되었으나 거창 청년 동맹은 1932년까지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이후 해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거창의 청년 운동은 1920년대 지역 민족 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였고, 1930년대에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 활동에 제약을 받아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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