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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891
한자 金千萬
이칭/별칭 김화서(金化瑞)
분야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가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2년연표보기 - 김천만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7년 11월 - 김천만 의병 활동 시작
활동 시기/일시 1909년 3월 - 김천만 군자금 모집 활동 시작
활동 시기/일시 1910년 1월 27일 - 김천만 일본 경찰에 체포
몰년 시기/일시 1910년 10월 31일연표보기 - 김천만 교수형 집행
추모 시기/일시 2013년연표보기 - 김천만 건국 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김천만 출생지 - 경상남도 거창군 가남면 수월동
거주|이주지 김천만 거주지 - 경상남도 삼가군 승지면 갈전리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의병장

[정의]

개항기 거창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병장.

[개설]

김천만(金千萬)[1862~1910]은 1907년 11월부터 경상남도 일대에서 부하 30여 명을 이끌고 경상남도 안의군, 삼가군, 합천군, 함양군 등지를 거점으로 의병 활동을 하였고, 1909년 3월부터 10월까지는 김유준(金有俊), 오낙삼(吳落三), 심낙준(沈落俊) 등과 함께 거창 지역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가계]

김천만의 자(字)는 화서(化瑞)이다. 경상남도 거창군 가남면(加南面) 수월동(水月洞)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07년 11월부터 약 3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경상남도 안의, 삼가, 합천, 함양 등의 지역에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는 등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5월 18일에는 의병 25명을 이끌고 삼가군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펼쳤으며, 1909년 3월부터 10월까지는 부(副)대장 김유준, 심낙준, 오낙삼 등과 함께 활동하면서 경상남도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았다. 같은 해 5월 18일 삼가군 고현면(古縣面) 장기동(場基洞) 시장을 정찰하던 김유준이 체포되자 김천만은 심낙준, 오낙삼 등과 시내 각처에 방화를 한 뒤 혼란을 틈타 김유준을 구출하였다.

한편, 1909년 7월 4일 부대장 심낙준 외 7명이 체포되었는데, 취조 결과 김천만이 대장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결국 김천만은 1910년 1월 27일 잠복 중이던 거창 경찰서 순사에게 체포되어 강도 및 방화죄로 기소되었고, 1910년 7월 29일 부산 지방 재판소 진주 지부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김천만은 이에 공소하였으나 1910년 9월 6일 대구 공소원에서 기각되었고, 재차 상고하였으나 1910년 10월 4일에 다시 기각되었다. 1910년 10월 31일, 결국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2013년 김천만에게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거창군사 편찬 위원회, 『거창군사』(거창군, 1997)
  • 공훈 전자 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 국가 보훈처 독립 유공자 공훈록(http://mpva.go.kr/narasarang/gonghun_list.asp)
  •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Mai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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