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1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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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漁村-運動-模範-寧海面絲津里- |
영어공식명칭 | A Model Village for the Saemaul Movement in Fishing Village: Sinari Village in Sajin-ri, Yeonghae-myeon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사진2리 시나리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창기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1년 - 시나리 어촌계 영덕군 최우수저축상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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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1년 - 시나리 어촌계장 김영창 전국농어민대상 수상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2년 - 시나리 어촌계장 김영창 새마을훈장 협동장 수상 |
현 소재지 | 시나리마을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사진2리 시나리마을 |
[정의]
갯바위 틈에서 낙토를 일군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사진2리 시나리마을의 성공적인 어촌 새마을운동 이야기.
[개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어촌계장 김영창씨를 중심으로 주민들이 일치 단합하여 외부 사회로 통하는 도로를 개설하고, 저축운동, 자연산 미역 서식장 조성, 미역과 멍게 양식장 개설, 어장 개설, 어항 정비 등의 큰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시나리 마을을 살기 좋은 모범 어촌으로 만들었다.
[시나리의 자연환경과 주민들의 삶]
영해면 사진2리 시나리는 영해면 소재지인 성내리에서 동남쪽으로 약 4㎞, 동해안의 주요 어업 전진기지였던 축산항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3㎞ 지점에 자리한 어촌이다. 여름철 해수욕장으로 잘 알려진 대진해수욕장은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약 5㎞를 가야 한다. 시나리란 지명은 나루가 실처럼 길게 뻗어 있어 '실나루[糸津]', '실나리'라 하다가 음이 변하여 '시나리'가 되었다고 한다.
시나리는 1980년대 초 해안도로가 개통되기 전에는 사방 10리[4㎞] 안에 차량이라곤 접근할 수 없는 오지였다. 이 마을에서 차량 통행이 가능한 도로까지 가려면 10리가 넘는 큰 고개를 넘어 영해면 소재지로 나가거나, 바닷가 벼랑길을 곡예하듯이 걸어서 축산항이나 대진해수욕장까지 나가야 하였다. 가히 '육지 속의 낙도(落島)'라 할 만한 고립된 오지였다.
동해안의 대부분 어촌들이 다 그렇지만, 특히 시나리는 대진해수욕장 앞의 상대산에서부터 망일봉, 망월봉, 봉화산 등으로 이어지는 높은 산등성이가 바다에 바짝 붙어서 남북으로 뻗어 내리기 때문에, 해안은 경사가 매우 가파르다. 이러한 지형은 시나리 주민들의 삶을 매우 고달프게 하였다. 가파른 경사면에 마을을 이루었기 때문에 주변에 논이라고는 단 한 평도 없다. 주민들은 비탈진 경사면의 좁은 밭에 보리와 조, 고구마 등을 재배해서 양식에 보탰다.
주된 생업의 터전인 바다 또한 갯바위투성이다. 배를 접안시키기가 힘들 뿐만 아니라 수중 암초 때문에 웬만한 선박은 통행하기도 어려웠다. 기껏해야 노를 젓는 0.2~0.3 t 정도의 소형 선박으로 원시적인 어업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주민들은 가난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가난은 시나리 주민들의 숙명이었다. 대를 물리는 숙명적인 가난 속에서 주민들은 체념하였다. 삶에 대한 의욕도 장래에 대한 희망도 가질 수 없었다.
[대명천지로 통하는 도로 개설]
고립된 시나리의 주민들에게 가장 절실한 소망은 외부로 통하는 교통로를 개설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험한 고개와 해안 절벽을 뚫고 도로를 개설한다는 것은 엄두도 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시나리 주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준 것은 5.16군사정변 이후 군사정부에서 추진한 국토개발사업이었다. 미국 원조물자인 '4.8양곡'을 국토개발사업에 투입한 것이었다. 영덕군에서 이 '4·8양곡'을 영해~사진 간 도로공사에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다. 괴시리 호지말 뒤편에서 고개를 넘어 마을에 이르는 약 3.6㎞의 길을 닦는 공사는 1968년 초봄에 시작하여 1973년 말에 준공하였다.
영해로 통하는 비포장도로가 개설된 후 주민들은 해안을 따라 축산항이나 대진해수욕장으로 통하는 도로를 개설하고자 하였다. 해안 절벽을 절개해서 도로를 개설해야 하는 이 공사는 더욱 힘든 일이었다. 이러한 주민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국방부에서 해안방어를 위한 작전도로를 개설하기로 한 것이다. 비탈진 암반을 절개해서 도로를 개설해야 하는 난공사였지만 군 공병대의 지원을 받아 공사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서 1981년 11월에 축산에서 시나리까지 1차 공사를 마무리하고, 시나리에서 대진에 이르는 나머지 공사는 1982년 11월에 준공하였다.
이로써 대진해수욕장에서 축산항에 이르는 8㎞의 대축도로(大丑道路)가 완공된 것이다. 비록 비포장이었지만 주민들은 대명천지로 통하는 천지개벽을 이루었다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기뻐하였다. 시나리에서 영해, 축산, 대진에 이르는 세 갈래 도로는 이제 2차선으로 포장되어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용하는 유명한 관광도로가 되었고, 영덕→강구→축산→대진→영해→영덕을 순환하는 시내버스가 하루에도 10여 차례 이상 운행되고 있다. 주말이면 수많은 차량들이 줄을 잇는다. 가히 상전(桑田)이 벽해(碧海)가 되었다고 할 만한 변화이다.
[저축운동과 자연산 미역 서식장 조성]
희망을 잃고 체념 속에 살아가던 시나리 주민들이 새로운 삶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이다. 마을 바깥세상에서는 '잘 살아보자'는 구호를 외치며 새마을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던 시기였다. 온 나라를 뒤흔들던 이 구호가 드디어 이 궁벽한 어촌에까지 전해진 것이다.
좌절감에 빠져 있던 주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고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착안한 것이 저축운동이었다. 처음에는 별 호응이 없었지만, 주민들의 통장에 저금액이 조금씩 쌓이자 저축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나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저축운동이 몇 년 지속되자, 시나리는 영덕군 내에서 단연 으뜸가는 저축마을이 되었다. 1981년에는 시나리 어촌계가 영덕군 최우수저축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갯바위 틈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운 것이다.
저축운동으로 마음을 합하고 자신감이 생기자 바다를 가꾸고 정비하는 각종 사업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주민들의 소득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가장 먼저 착수한 사업은 자연산 미역 서식장을 조성하는 사업이었다. 미역은 수심이 깊지 않은 바위에 붙어서 서식한다. 미역이 서식하는 바위를 주민들은 ‘짬’이라 부른다. 짬은 어촌계의 공동재산으로서 짬에서 나오는 수익금은 연말에 소속 어촌계원들에게 분배한다. 질 좋은 자연산 미역을 많이 생산하려면, 미역이 자랄 수 있는 짬의 면적이 넓어야 하고, 서식환경을 잘 가꾸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주민들은 수면 위로 솟아 있는 암반을 발파해서 수중 50㎝~1m가 되도록 짬의 높이를 조정하는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렇게 하면 미역이 서식할 수 있는 짬의 표면적이 훨씬 늘어나게 된다. 그리고 짬의 분배방식을 바꾸었다. 짬을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집단으로 관리하던 방식에서 짬을 세분하여 개인단위로 배당해서 관리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자 집단으로 관리할 때보다 더 열심히 짬을 관리하여 생산량이 대폭 증가하였다.
[미역·멍게 양식장과 어장 개설]
주민들의 소득증대사업은 자연산 미역 서식장 조성에만 그치지 않고 미역과 멍게 양식장 조성, 어장 개설, 어선 건조 등의 사업으로 확대되었다.
미역 양식장은 당국의 허가를 받아 여러 명이 협업으로 운영해야 하는데, 시나리에서는 1970년대 초반에 당국의 재정 지원을 받아 5곳에 미역 협업 양식장을 개설하였다. 이 미역 양식장도 주민의 소득 증대에 크게 기여하였지만, 미역보다는 멍게[우렁쉥이]를 양식하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1982년부터 미역 양식장을 멍게 양식장으로 개체(改替)하기 시작하였다. 멍게 양식장을 조성하는 데는 많은 자금이 소요되지만, 연 0.5%로 이율이 매우 낮은 수산업협동조합의 농어촌특별지원사업[농특사업]의 자금을 유치하고, 모자라는 자금은 일반 융자금을 대출받아서 충당하였다. 멍게 양식장은 미역 양식장에 비해 자금도 많이 소요되고 힘도 훨씬 많이 들지만, 소득은 미역 양식에 비할 수 없이 높았다.
멍게 양식장 개체사업과 병행해서 추진한 사업이 어장조성사업이었다. 어장은 당국의 허가를 취득해서 개인사업으로 추진한 것인데, 여기에도 수산업협동조합의 저리융자를 유치해서 자금으로 충당하였다. 이때 조성한 어장으로는 협업어장 4건, 연안호망어장[작은 어장] 2건, 대형 정치망어장 1건 등 모두 7건이었다. 이제 시나리는 0.2~0.3 t 규모의 노 젓는 전마선으로 미역이나 따고 해삼이나 전복을 따는 원시적 어업에서 멍게 양식과 어장을 통해서 높은 소득을 올리는 마을로 변모해 갔다.
주민들이 영위하는 어업의 양태가 다양해지자, 종전의 소형 어선으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뒤따랐다. 자연산 미역이나 해삼, 전복을 채취하던 시절에 운행하던 소형 어선으로는 양식어업이나 자망어업을 영위할 수가 없었다. 어촌 계원 가운데서 희망자를 선발하여 수산업협동조합의 융자를 받을 수 있도록 알선해서, 점차 소형 어선을 중형 어선으로 개체하거나 새로 중형 어선을 건조해 나갔다.
자연산 미역 서식장을 조성해서 질 좋은 미역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멍게 양식장에서 고소득을 올리고, 어장어업이 보급되면서 주민들의 소득은 엄청나게 증가하였다. 대물림하던 가난을 탈피하기가 불가능할 것으로 믿었던 시나리가 이제는 부자마을이 된 것이다.
[갯바위를 옮기고 마련한 어항]
소형 전마선으로 원시적인 어업에 매달리던 시나리 주민들이 바다를 개척해서 삶의 터전을 가꾸어 가기 위해서는 중형 선박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고, 여러 척의 어선이 정박할 수 있도록 어항을 정비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였다. 시나리 포구는 갯바위가 많고 수중에도 암초가 수없이 널려 있어서 소형 선박 이외에는 출입할 수 없었고, 갯바위 사이의 좁은 공간에는 소형 선박이나마 몇 척밖에는 정박할 수 없었다. 어로장비와 어획물을 싣고 내릴 수 있는 물양장도 자연 암반을 이용한 원시적인 수준이었다. 먼바다로부터 밀어닥치는 파도를 막아줄 방파제 시설도 없었다.
파도를 막아줄 견고한 방파제를 건설하고, 여러 척의 중형 선박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정박할 수 있도록 항만을 제대로 정비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필요하였다. 어촌계장과 주민들은 재정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이러한 주민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1978년부터 군비와 도비의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정부의 지원은 1982년까지 계속되었다. 남쪽과 북쪽의 방파제를 완공하고, 방파제 안쪽의 암반을 들어내서 중형 선박이 여러 척 정박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암초를 폭파해서 제거하는 작업은 주민들이 고생을 가장 많이 하였고, 그런 만큼 보람도 가장 컸던 사업이었다. 항구 내에는 무수히 많은 암초들이 흩어져 있었고, 3층 건물 규모의 대형 암초도 항내에 버티고 있었다. 수중에도 크고 작은 암초들이 깔려 있었다. 주민들이 인력으로 암초를 들어내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규모가 작은 일부를 제거하는 데 그칠 뿐이었다. 중형 이상의 선박이 자유롭게 드나들고 여러 척이 정박하기 위해서는 수중 암초들을 폭파해서 들어내야만 하였다. 중장비와 전문기술이 동원된 이 사업에 정부지원금이 집중 투입되었다.
공사는 전문업체가 맡아 하였지만, 주민들이 해야 할 일도 엄청나게 많았다. 주민들은 이 사업이 마무리될 때까지 물속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모든 주민이 희생을 감수하고 추진한 대역사였다. 이렇게 해서 시나리가 오늘의 항만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86년 이후이다.
항만 시설을 정비한 후 마을은 빠른 속도로 변해갔다. 항만이 정비되기 이전에는 마을 내에 소형 전마선[0.2~0.3 t 정도] 11~12척에 불과하던 것이 공사가 끝나고 난 이후에 선박 소유가 크게 늘어났다. 전마선을 그대로 운행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수산업협동조합의 영어자금을 융자받아서 소형 선박을 중형으로 개체하거나 중형 선박을 새로 건조하는 가구가 많이 늘어난 것이다. 한때는 90여 가구가 사는 마을에 선박이 72척이나 운행된 적도 있었다. 노동력이 없는 노인가구를 제외하고는 집집마다 배를 소유하게 된 셈이다.
[시나리 어촌 새마을운동의 성공 요인]
새마을운동이 성공적으로 추진된 마을에서는 어느 곳에서나 지도자의 헌신적 노력이 중요한 동력이 되고 있다. 시나리의 새마을운동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난을 벗어난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으로 여겼던 주민들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지역개발에 발 벗고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며 주민을 설득하고 마을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한 김영창 어촌계장의 적극적인 노력이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김영창은 1937년 시나리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부친이 사망하고,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가정을 돌보느라 상급학교 진학은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어릴 때 너무 가난하게 살았고 고생을 많이 해서 오로지 가난을 벗어나는 일만 생각하였다. 처음에는 어촌계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여러 차례 받고도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그러나 축산수산업협동조합장과 마을 주민들이 거듭 요청하는 것을 계속 거부하기도 어려워 1977년 7월에 사진2리[시나리] 어촌계장에 취임하였다.
어촌계장에 취임하고서 가장 먼저 착수한 사업은 저축운동이었다. 처음에는 모두 시큰둥하고 냉소적이었지만 차츰 주민들이 호응해 주어서 1981년에는 시나리 어촌계가 영덕군 최우수저축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그다음에 신경을 쓴 것은 자금을 유치하는 일이었다. 수산업협동조합으로, 군청으로 분주하게 쫓아다니며 남들이 기피하는 각종 지원금, 융자금 등을 적극적으로 유치하였다. 이 자금으로 자연산 미역 서식장을 조성하고, 협업어장을 개설하고, 갯바위를 들어내고 중형 선박이 드나들 수 있도록 어항을 정비하였다. 짧은 기간에 많은 자금을 유치해서 연속적으로 큰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던 데에는 김영창의 집념과 고집이 바탕에 깔려 있다. 평생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아온 김영창을 주민들이 믿고 따라주었던 것도 시나리의 새마을운동이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김영창의 이러한 헌신적 봉사가 널리 알려져서 1981년에는 수산업협동조합중앙회가 수여하는 전국새어민상을 수상하였고, 같은 해에 전국농어민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1982년에는 새마을훈장 협동장을 받았다. 이때부터 시나리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마을이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수산업협동조합중앙회에서는 시나리 새마을운동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교육홍보용으로 활용하였다. 김영창 또한 유명인사가 되어 수산업협동조합중앙회 교육 강사로 출강하고, 여러 곳에서 성공사례도 발표하였다. KBS-TV에도 출연하여 성공사례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새마을운동은 지도자의 노력만으로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주민들이 지도자를 믿고 따라줄 뿐만 아니라 발전 가능성에 대해서 공감하고 서로 긴밀하게 협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협동체계를 구축하는 데 어촌계가 큰 힘이 되었다. 저축운동이 어촌계원을 중심으로 출발하였고, 자연산 미역 서식장 조성사업, 미역과 멍게 양식장 및 어장 조성사업도 어촌계가 중심이 되었다. 도로를 개설하는 과정에 편입된 주택의 보상비를 마련하는 데에도 어촌계의 공동기금이 투입되었다. 주민들이 일치단결해서 어려운 작업을 공동으로 추진할 수 있었던 것도 어촌계가 오랜 세월 동안 구축해 온 협동적인 생활의 경험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또한 적절한 시기에 적극적으로 도와준 행정관서의 지원도 마을 개발에 큰 힘이 되었다. 어촌 개발 사업은 일반 농촌의 개발 사업에 비해서 어려움이 훨씬 더 크고, 재정적인 지원의 필요성도 훨씬 절실하다. 이 점에서 시나리는 지도자의 현명한 판단과 적극적인 노력으로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지원을 유치할 수 있었다. 단위수산업협동조합과 수산업협동조합중앙회의 각종 지원은 물론 군청과 도청의 활용 가능한 예산을 적극 유치하였고, 마을을 떠난 출향민들의 지원과 지역사회 독지가들의 협찬도 적극 활용하였다. 지도자의 적극적인 노력과 마을 주민들의 왕성한 개발 의욕이 이러한 자원을 유치하는 데 큰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시나리의 새마을사업은 지도자의 헌신적 봉사와 주민들의 조직적 협동, 그리고 당국의 적극적인 지원이 함께 일구어낸 어촌 새마을운동의 표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