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학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854
한자 朴鶴來
영어공식명칭 Park Hakrae
분야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신진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9년 6월 29일연표보기 - 박학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박학래 창수면 3.1독립운동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27년 1월 14일연표보기 - 박학래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17년연표보기 - 박학래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창수면 3.1독립운동
출생지 경상북도 경주군 강서면 금인동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동 167 지도보기
활동지 창수주재소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박학래는 경상북도 경주군 강서면 금인동에서 태어났으며 거주지는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동 167번지이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19일에 있었던 영덕군 창수면의 3.1독립운동은 창수주재소 부근에서 이수각(李壽珏)·이현설(李鉉卨)·이종구(李鍾龜) 등에 의해 주도되었고, 약 200명의 군중이 독립만세에 동참하였다. 창수동의 이수각(李壽珏), 신리동의 이현설(李鉉卨)과 권재형(權在衡), 인량동의 이현우(李鉉祐)는 동지를 규합하여 창수주재소 부근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하고 각 마을 주민들에게 권유하였다. 오후 4시 무렵, 약 200명의 군중은 각자 태극기 및 나무 몽둥이를 휴대하고 만세를 부르며 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창수동 구장 김재수(金在守)와 신리동의 권덕명(權德明) 등은 큰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주재소를 파괴하라고 독려하였다. 이어 창수주재소를 공격하여 주재소의 건물 및 기구를 파괴하였다. 창수주재소 사무실과 숙소 등 건물 3동의 문·벽·천장·문등(門燈)과 게시판·변소·목욕탕 등이 파괴되고 유치장의 기둥 및 마당의 나무는 잘려 나갔다. 사무실 서류와 기구, 총 3정과 대검 2정이 부숴졌으며, 순사들의 가구·의류·식기 등이 모두 파손되었다.

이때 박학래는 창수주재소로 몰려온 약 200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곧이어 박학래는 같은 마을 출신인 나재성·박봉현·박동이·정석근·맹학근·김화원·남출이·백수학 등과 함께 창수주재소에 있던 서류 등을 파기하였다. 박학래 외에도 신리동의 이형우·김대지,신리동의 정석출·우억만·윤순석·정재주·신갑수·오해봉·우주일·김도치·김덕규, 신기동의 이환이 등이 주재소에 있던 서류·장부·공문서 등을 찢어 버리고 파기하였다.

일제경찰이 3.19만세시위 참여자들을 대대적으로 잡아들였다. 체포자들 가운데 96명이 1차로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박학래(朴鶴來)가 그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일제 경찰에 체포된 박학래는 1919년 4월 10일 대구지검 경주지청에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으며,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및 공무집행 방해’, 소요, 주거침입, 건조물 손괴, 문서 훼기,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201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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