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8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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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千石 |
영어공식명칭 | Park Cheonseok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신진희 |
출생 시기/일시 | 1889년 8월 5일 - 박천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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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9일 - 박천석 창수면 3.1독립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29년 11월 9일 - 박천석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2년 - 박천석 대통령 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박천석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9일 - 창수면 3.1독립운동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리 |
활동지 | 창수주재소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박천석은 1889년 8월 5일 태어났으며, 본적지와 주소는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리이다.
[활동 사항]
영덕군 창수면의 3.1독립운동은 1919년 3월 19일 창수주재소 부근에서 약 200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친 사건을 말한다. 창수면 만세운동은 이수각(李壽珏)·이현설(李鉉卨)·이종구(李鍾龜)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창수동의 이수각(李壽珏), 신리동의 이현설(李鉉卨)과 권재형(權在衡), 인량동의 이현우(李鉉祐)는 동지를 규합하여 창수주재소 부근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하고 각 마을 주민들에게 권유하였다. 오후 4시 무렵, 약 200명의 군중은 각자 태극기 및 나무 몽둥이를 휴대하고 만세를 부르며 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창수동 구장 김재수(金在守)와 신리동의 권덕명(權德明) 등은 큰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주재소를 파괴하라고 독려하였다. 이어 창수주재소를 공격하여 주재소의 건물 및 기구를 파괴하였다. 창수주재소 사무실과 숙소 등 건물 3동의 문·벽·천장·문등(門燈)과 게시판·변소·목욕탕 등이 파괴되고 유치장의 기둥 및 마당의 나무는 절단되었다. 사무실 서류와 기구, 총 3정과 대검 2정이 부숴졌으며, 순사들의 가구·의류·식기 등이 전부 파손되었다.
오후 4시 무렵, 박천석(朴千石)은 주재소에 몰려온 약 200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였다. 뒤이어 박천석(朴千石)은 같은 마을인 창수동 출신인 이학술·김보식·박만복·신재휴 등과 함께 창수주재소에 진입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일제 경찰이 창수면 3.1운동 관련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박천석(朴千石)도 이때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박천석(朴千石)은 4월 5일 대구지검 경주지청에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으며,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상고하였으나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물 손괴, 기물 훼기, 공문서 훼기, 상해, 보안 법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확정받고 1920년 6월 31일 대구형무소에서 풀려날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묘소]
박천석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등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