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8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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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淑伊 |
영어공식명칭 | Park Sukyi |
이칭/별칭 | 박숙의,정본숙의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신진희 |
출생 시기/일시 | 1872년 6월 12일 - 박숙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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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9일 - 박숙이 창수면 3.1독립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55년 10월 17일 - 박숙이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2년 - 박숙이 대통령 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박숙이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9일 - 창수면 3.1독립운동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장구동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리 |
활동지 | 창수주재소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박숙이는 1872년 6월 12일 태어났으며, 본적과 주소는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장구동 마당두들[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리]이다. 이명으로 박숙의(朴淑義)라는 이름을 썼으며, 일본식 이름은 정본숙의(井本淑義)이다.
[활동 사항]
영덕군 창수면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9일 창수주재소 부근에서 이수각(李壽珏)·이현설(李鉉卨)·이종구(李鍾龜)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약 200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창수동의 이수각(李壽珏), 신리동의 이현설(李鉉卨)과 권재형(權在衡), 인량동의 이현우(李鉉祐)는 동지를 규합하여 창수주재소 부근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하고 각 마을 주민들에게 권유하였다. 오후 4시 무렵, 약 200명의 군중은 각자 태극기 및 나무 몽둥이를 휴대하고 만세를 부르며 창수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창수동 구장 김재수(金在守)와 신리동의 권덕명(權德明) 등은 큰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주재소를 파괴하라고 독려하였다. 이어 창수주재소를 공격해 주재소의 건물 및 기구를 파괴하였다. 창수주재소 사무실과 숙소 등 건물 3동의 문·벽·천장·문등(門燈)과 게시판·변소·목욕탕 등이 파괴되고 유치장의 기둥 및 마당의 나무는 절단되었다. 사무실 서류와 기구, 총 3정과 대검 2정이 부셔졌으며, 순사들의 가구·의류·식기 등을 전부 파손되었다. 그리고 만세 군중들은 오후 7시에 해산하였다. 이때 박숙이는 창수주재소에 온 약 200명의 군중과 함께 한국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곧이어 박숙이는 신리동의 이석범·박종하, 창수동의 박재흥·윤학근 등과 함께 몽둥이를 이용하여 주재소 벽을 무너뜨리는 데 동참하였다. 박숙이 외에도 장구동의 오만이, 오촌동의 이기성, 길상동의 김중규, 신리동의 신갑수 등은 돌로, 창수동의 김반석·박계도, 창수동의 유말동, 신리동의 정석출 등은 발로, 신리동의 황부칠·우주일·김도치 등은 손으로, 창수동의 백수학·이선봉, 신리동의 정재주·오해봉·김연순·김덕규·정학수 등이 함께 주재소 벽을 무너뜨렸다. 결국 일제 경찰에 의해 관련자들이 체포되었는데, 박숙이도 재판에 회부되었다.
박숙이는 4월 10일 대구지검 경주지청에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으며,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고,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물손괴, 기물훼기, 공문서 훼기, 상해,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확정받아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