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8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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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東活 |
영어공식명칭 | Park Donghwal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진호 |
출생 시기/일시 | 1891년 12월 29일 - 박동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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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박동활 영해면 3.1독립운동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박동활 축산면 3.1독립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42년 3월 15일 - 박동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2년 - 박동활 대통령 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박동활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영해면 3.1독립운동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축산면 3.1독립운동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부곡동 242 |
활동지 | 성내동시장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
활동지 | 상원동 -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상원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박동활은 1891년 12월 29일에 태어났으며, 거주지는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부곡동 242이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12일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 교회에서 김세영(金世榮)은 권태원(權泰源)에게 3.1운동의 전개 상황을 설명하였다. 이어 병곡면 송천동 교회의 정규하(丁奎河) 등도 3.1운동 준비에 가담하였다. 김세영 등은 영덕군 내 교회 신자 및 여러 인사와 회합을 갖고 참여를 독려하였다. 그리고 3월 18일 영해면 성내동[성내리]에서 영해면 3.1독립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3월 18일 오후 1시경 장날을 맞이하여 성내동 시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런 가운데 정규하·박의락(朴義洛)·남효직(南孝直) 등이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며 ‘한국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때 성내동 시장에 있던 박동활(朴東活)은 영해면 괴시동에서 온 김실광(金實光)과 지동에서 온 황선의(黃善儀)의 권유를 받고 군중에 합류하였다. 군중들은 각처로 분산되어 독립만세를 외쳤는데, 그중 약 150여 명이 영해경찰관주재소로 이동하였다. 이어 영해 공립보통학교에 가서 학생들의 참여를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자, 훈도 배병렬(裵秉烈)을 붙잡아 주재소로 끌고 와서 다시 만세를 외쳤다. 일경들이 해산을 요구하고 태극기를 압수하려고 시도하자, 군중들은 주재소에 돌을 던지고 순사를 공격하였다. 이때 박동활은 주재소 문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고 군중들은 주재소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였다. 한편 일부 군중들은 보통학교·소학교·우편소·면사무소를 공격하였다.
오후 3시 30분경 영해경찰서의 연락을 받은 영덕경찰서 서장·순사·순사보 등 5명이 영해에 도착하였다. 일경들은 군중들을 무력으로 해산시키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저항에 부딪쳐 주재소로 퇴각하였다. 이때 박동활과 권상호·남효직·김실광·황선의 등과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이에 경찰들이 영덕을 향해 도주하자 박동활·김실광·황선의 등 40~50명의 군중들이 서장 일행들을 추적하였다. 경찰들은 주재소 동남쪽 약 400m 지점에서 군중들의 추적을 저지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무기를 빼앗기고 재차 도주하였다. 순사 1명과 순사보 1명은 영덕까지 도망쳤으나, 서장과 경찰 2명은 축산면 상원동 최수경(崔壽敬) 집 부근에서 축산면 면민과 박동활 등 영해에서 추적해 온 군중들에게 붙잡혔다. 박동활 등은 서장과 경찰 2명을 붙잡아 포박하고 구타하였으며, 칼을 빼앗고 제복과 제모를 파손하였다. 그리고 인사불성이 된 경찰들을 영해로 끌고 와서 광본여관에 감금시켰다.
영해면·축산면 3.1독립운동이 끝난 후 일경의 검거 작전이 시작되었고 박동활도 체포되었다. 박동활은 4월 14일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에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 공무집행 방해, 건조물 손괴,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상해 및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6월 선고받았다. 일제의 판결에 공소를 제기하여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 부분 취소에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