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8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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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出伊 |
영어공식명칭 | Nam Churi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진호 |
출생 시기/일시 | 1881년 10월 9일 - 남출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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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9일 - 남출이 창수면 3.1독립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32년 1월 24일 - 남출이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7년 - 남출이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9일 - 창수면 3.1독립운동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리 |
활동지 | 창수경찰관주재소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남출이(南出伊)는 1881년 10월 9일에 태어났으며, 거주지는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동이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18일 오후 1시경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동 시장에서 영해면 3.1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영해면 만세운동 소식을 들은 창수면 주민들도 3월 19일 영해면 3.1독립운동에 참여하고자 영해로 향하였다. 그러나 창수면 오촌동·삼계동·갈상동·신리동 주민들이 모여 영해로 출발하려고 할 때 시간상 영해로 가기는 곤란하여 창수동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한편, 창수동의 방가동 구장 이수각(李壽珏)과 그의 아들 이학술(李學述) 등은 창수동에서 독립만세를 외친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때 남출이는 이현설·김경발·이숙각 등의 권유를 듣고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3월 19일 오후 4시경 창수경찰관주재소 부근에 약 200명의 군중들이 모여든 가운데 창수면 3.1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군중들은 각자 몽둥이를 휴대한 채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주재소로 향하였다. 이현설·이현우·권재형·박치운(朴致雲) 등이 선두에서 군중을 이끌었다. 김재수(金在守)·권덕명(權德明) 등은 큰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주재소를 파괴하라’고 소리쳤다. 남출이도 창수동의 맹학근(孟學根)·김상준(金尙俊)·김화원(金華元)·나성운(羅星雲)·나재성(羅在星) 등과 함께 주재소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군중들이 주재소로 들어가 일경의 대검을 탈취하려고 하자, 순사와 순사보들이 도주하였다. 그러자 이현설·이수각 등이 지휘하여 군중들은 주재소 건물·창·벽 등을 파괴하고 서류·공문서 등을 찢거나 서적·의자·기물들을 사무실 밖으로 내던졌다. 이에 남출이도 김화원·나재성·맹학근·김도치(金道致) 등과 함께 주재소 사무실에 들어가 서류·장부·공문서 등을 찢어버리고 파기하였다.
창수면 3.1독립운동이 끝난 후 남출이는 일경에 의해 체포되었다. 남출이는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에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 공무집행 방해, 건조물 손괴,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상해 및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을 선고 받았다. 일제의 판결에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 부분취소에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