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8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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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世榮 |
영어공식명칭 | Kim Seyeong |
이칭/별칭 | 추암(湫岩)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한준호 |
출생 시기/일시 | 1889년 - 김세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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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김세영 영해면 3.1독립운동 주도 |
몰년 시기/일시 | 1979년 - 김세영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8년 - 김세영 대통령 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김세영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영해면 3.1독립운동 |
출생지 |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낙평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기독교 조사 |
[정의]
일제강점기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호는 추암(湫岩). 김세영은 1889년(고종 26)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낙평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김세영은 1919년 당시 영덕군 지품면 낙평리에서 기독교 조사(助事)로 활동하고 있었다. 김세영은 3월 상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서울로 갔다가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고향 영덕으로 돌아왔다. 3월 12일 김세영은 낙평리 교회에서 권태원(權泰源)에게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서의 민족자결주의 채택과 서울·평양·대구 등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한 후, 병곡면 송천리 정규하(丁奎河)와 협의하여 영덕읍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자고 하였다. 김세영의 제안에 권태원이 3월 15일 정규하와 협의하였는데, 정규하는 "3월 18일 영해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독립운동을 하자."고 제의하였다. 정규하의 제안에 권태원이 동의하자, 정규하는 바로 지역 양반들의 참가 권유를 부탁하였으며, 3월 16일에는 병곡면 송천리 예배당에서 90여 명의 기독교 신자들에게도 계획을 알리고 참여를 권유하였다. 또 3월 17일에는 자신의 집에서 태극기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김세영은 일제 경찰의 예비검속으로 3월 18일 영해면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3월 18일 오후 1시경 정규하·남계병(南啓炳)·남효직(南孝直) 등과 군중들은 영해면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군중들은 영해면에 있는 주재소·면사무소·우편소·학교 등지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어서 정규하는 오후 2시경 약 200여 명의 군중들을 이끌고 병곡면으로 이동하여 주재소·면사무소 등지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김세영은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 검사국과 대구지방법원을 거쳐 1919년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김세영은 1920년대 영덕기독교청년회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8년 대통령 표창,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