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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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德壽 |
영어공식명칭 | Kim Deoksu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68년 2월 19일 - 김덕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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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김덕수 영해면 3.1독립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37년 4월 29일 - 김덕수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2년 - 김덕수 대통령 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김덕수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영해면 3.1독립운동 |
출생지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65-1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김덕수(金德壽)[1868~1937]는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19년 영덕 지역의 3.1운동은 영덕군 지품면 낙평리 교회 조사(助事)로서 경성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직접 목격한 김세영(金世榮)과 구세군(救世軍) 참위(參尉) 권태원(權泰源), 병곡면 송곡리 교회 조사 정규하(丁奎河) 등에 의해 계획되었다. 김세영 등은 3월 18일 영해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군내의 영해면·병곡면·축산면·창수면의 기독교도와 토착 향반을 규합하였다. 김덕수도 거사 계획에 적극적으로 찬동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오후 1시경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에서 영해면 3.1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김덕수는 3,0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김덕수와 군중들은 영해주재소로 진입하여 일본 경찰을 위협해 일본 경찰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이때 주임순사 스즈키[鈴木鶴次郞]가 해산을 명령하며 태극기를 뺏으려 하자, 김덕수 등은 주재소를 공격하고 순사부장을 넘어뜨린 후, 2명의 일본 순사의 모자와 칼을 빼앗았다. 그리고 영해공립보통학교로 가서 평소 일제의 정책을 찬양하던 교사들을 규탄하였다. 또한 일본인 소학교, 우편소, 면사무소를 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재차 영해주재소로 몰려가 주재소 안에 걸려 있던 경찰복을 모두 찢어버리고, 장총 4정과 87발의 실탄을 탈취 파기하였다. 마침 영해주재소의 응원요청을 받은 영덕경찰서 서장 시게요시손[茂義孫]와 4명의 경찰이 황급히 출동하였다. 일본 경찰들은 시위를 제지하려다가 시위군중의 위세에 눌려 철수하였다. 김덕수는 격분한 시위군중과 함께 일본 경찰들을 추격 포위하여 총과 칼을 빼앗고, 제복을 찢은 후 곤봉 세례를 가한 뒤, 일본 경찰들을 일본인이 경영하는 수본(水本)여관에 감금하였다.
만세시위운동은 3월 19일까지 계속되었다. 3월 19일 오전 11시경에 이르러서 경상북도 포항 일본 헌병대에서 헌병 분대장과 6명의 헌병이 시위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일본 헌병대도 엄청난 군중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3월 19일 오후 5시경, 대구에 있는 일본군 보병 80연대 장교 이하 17명이 도착하여 헌병들과 합세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함으로써 시위 군중을 강제 해산시켰다. 이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 작전이 시작되었고 김덕수도 체포되었다. 6월 5일 김덕수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았다. 일제의 판결에 공소하였으나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