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8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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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大支 |
영어공식명칭 | Kim Daeji |
이칭/별칭 | 金大智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진호 |
출생 시기/일시 | 1897년 4월 8일 - 김대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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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9일 - 김대지 창수면 3.1독립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23년 7월 15일 - 김대지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8년 - 김대지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9일 - 창수면 3.1독립운동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리 |
활동지 | 창수경찰관주재소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김대지(金大支)는 1897년 4월 8일에 태어났으며, 거주지는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미곡동 313이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18일 오후 1시경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동 시장에서 정규하(丁奎河)·박의락(朴義洛)·남효직(南孝直)·남세혁(南世爀)·권상호(權相鎬) 등의 주도로 영해면 3.1독립운동이 일어나면서, 영덕군 각 면으로 3.1운동이 확산되었다. 3월 19일 영양(英陽)의 이종구(李鍾龜)도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하기 위하여 오촌동·삼계동의 주민 수십 명과 함께 영해면으로 향하였다. 갈상동과 신리동의 주민들도 영해로 향하였는데, 이때 김대지(金大支)[1897~1923]는 신리동에서 권재형(權在衡)·이현우(李鉉祐) 등으로부터 참여 권유를 받고 참가하였다. 김대지 등이 신기동에 이르렀는데, 이미 신기동 주민들은 영해면으로 떠난 후였다. 김대지와 주민들은 협의를 하여 영해로 가는 것은 시간적으로 어려움이 있음으로 중지하고, 창수동에 가서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결정하였다.
3월 19일 오후 4시경 창수경찰관주재소 부근에서 약 200명의 군중들이 집합해 각자 몽둥이를 휴대하거나 태극기를 흔들고 행진하면서 창수면 3.1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창수동 구장 김재수(金在守)와 신리동 권덕명(權德明) 등이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주재소를 파괴하라고 주창하였다. 김대지는 같은 동리의 주민 김도치(金道致)·황부칠(黃夫七)·김경발(金景發) 등과 함께 주재소에서 독립만세를 소리쳤다. 군중들이 주재소를 공격하고 사무실로 들어가 일경들의 대검을 탈취하려고 하자, 순사와 순사보들이 주재소를 버리고 도주하였다. 이에 김대지를 비롯한 시위대는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고, 서류·장부·공문서 등을 파기하였다.
창수면 3.1독립운동이 끝난 후 일경의 검거가 시작되었다. 특히, 김대지를 비롯해 신리동 주민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김대지는 4월 5일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에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 공무집행 방해, 건조물 손괴,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상해 및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아 공소를 제기하였다.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 부분취소에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상훈과 추모]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