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7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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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鉉卨 |
영어공식명칭 | Lee Hyeonseol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진호 |
출생 시기/일시 | 1894년 6월 15일 - 이현설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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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9일 - 이현설 창수면 3.1독립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52년 5월 24일 - 이현설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8년 - 이현설 대통령 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 이현설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9일 - 창수면 3.1독립운동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리 308 |
활동지 | 창수경찰관주재소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신리동 구장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이현설은 1894년 6월 15일 태어났으며, 거주지는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리 308이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18일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동 시장에서 정규하(丁奎河)·박의락(朴義洛)·남효직(南孝直) 등이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 운동을 시작하면서 영덕군 내 각면으로 3.1 운동이 확산되었다. 이 무렵 영양(英陽)의 이종구(李鍾龜)가 소식을 듣고 3월 19일 창수면 오촌동·삼계동 주민 수십 명을 이끌고 영해로 향하다 신기동에 이르렀다. 갈상동의 박재복(朴在福)·김응상(金應相), 신리동의 권재형(權在衡)·이현우(李鉉祐) 등도 주민들을 권유해 신기동에 이르렀다. 주민들은 신기동에서 영해로 가는 것을 중지하고 창수동으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의견을 모았다. 또한 신리동의 구장인 이현설(李鉉卨)을 만나 만세시위 운동에 대해 협의하였다. 신리동 주민들은 일제의 도로 공사로 인근 전답을 강제로 수용당하여 불만을 갖고 있는 터라 만세시위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에 이현설과 이현우는 이진택(李鎭澤)·정석출(鄭石出) 등 주민들을 설득하여 약 150명의 주민들을 이끌고 만세시위에 합류하였다. 한편, 영해면 3.1독립운동 상황을 통보받은 창수경찰관주재소 순사와 순사보들은 소유물을 인근 주민들 집에 미리 보관하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였다.
3월 19일 오후 4시경 이현설을 비롯해 약 200명의 군중들이 창수경찰관주재소를 향해 각자 몽둥이를 휴대하거나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하였다. 이현설·이현우·권재형·박치운(朴致雲) 등이 선두에서 군중들을 지휘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군중들이 주재소를 공격하고 사무실로 들어가 일경들의 대검을 탈취하려고 함에 일경들은 도주하였다. 그러자 이현설과 이수각 등의 지휘하에 군중들은 주재소로 진입해 건물, 창, 벽 등과 시설물들을 파괴하고 서류, 장부, 공문서, 서적 등을 찢거나 사무실 밖으로 내던져 파손시켰다. 또한 일경들의 숙소 담이나 굴뚝을 파손하고 기둥을 부수고 벽을 망가뜨렸다. 또한 총 3정과 대검 2개를 파손시켰다. 그리고 실내로 들어가 목욕장과 목욕장 솥을 부수고 의류, 가구, 이불, 식기 등을 꺼내 파손시켰다. 이현설도 이현우 등과 사무실에 들어가 나무 몽둥이로 건물을 부쉈다.
오후 7시경 주재소를 공격 파괴한 후 만세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열창하고 개사(改詞)한 노래를 부르며 귀가하기 위해 창수교까지 갔다. 군중들은 일경들이 소유물을 사전에 보관해 둔 사실을 알고 약 30명의 군중들이 장명술(張命述)·박만복(朴萬福)의 안내로 오용이(吳龍伊)·박석문(朴石文)·이강복(李康福)의 집들을 습격해 일경들의 물건을 파손시켰다.
창수면 3.1독립운동으로 신리동에서 35명이 체포를 당하였다. 그리고 이어진 검거 작전으로 신리동의 남성 130여 명 가운데 16명만 남아 5월 동안 농사일을 하였다. 이현설도 이때 체포되어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 공무집행 방해, 건조물 손괴,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상해 및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4년을 받았다. 이에 공소를 제기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취소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이현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