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7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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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斗煥 |
영어공식명칭 | Oh Duhwan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영배 |
출생 시기/일시 | 1881년 - 오두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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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오두환 산남의진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11월 - 오두환 의진 결성 |
몰년 시기/일시 | 1909년 7월 23일 - 오두환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17년 - 오두환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대서면 궁기동 - 경상북도 영덕군 달산면 흥기리 |옥산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의병장 |
[정의]
개항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의병.
[가계]
오두환(吳斗煥)[1881~1909]은 순국 당시 29세였기에 1881년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적은 경상북도 영덕군 대서면(大西面) 궁기동(宮基洞)[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달산면 일원]이다.
[활동 사항]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권수호를 위한 의병들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든 시종관(侍從官) 정환직(鄭煥直)이 맏아들 정용기(鄭鏞基)를 불러 영남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키도록 지시하였다. 밀지를 받들었다는 소문으로 영남지역 각지에서 의병들이 모여들었다. 이로써 1906년 봄 경상북도 영천에서 산남의진이 결성되었다. 산남의진은 정용기 전사 뒤 정환직이 대장을 맡았으나, 정환직마저 순국하면서 곧 해산되었다.
오두환은 정용기·정환직 부자가 이끈 산남의진에서 1906년과 1907년까지 2년 동안 활동하였다. 산남의진이 영해(寧海)의 신돌석(申乭石) 부대와 서로 호응할 때 교류 종사(從事)로 내왕하였다. 당시 경상북도 지역에서는 영천 보현산(普賢山)을 중심으로 하는 산남의진과 영양(英陽) 일월산(日月山)을 중심으로 하는 신돌석의 영릉의진(寧陵義陣)이 남북에서 호응하며, 일본군 수비대의 공격에 대응하던 때였다.
1907년 11월 13일 정환직이 순국하자 영덕·청송 지역에서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1908년 11월경에 산남의진 활동했던 신석존(申石存) 등 십 수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군자금과·군수품 모집 활동을 시작하였다. 1909년 1월 9일 밤 김성일(金聖一)·최재팔(崔在八)·어호준(魚浩俊)·김안농(金安農)·이칠령(李七令)·김원조(金元祚) 등 6명과 함께 영덕군 외남면(外南面) 회동(晦洞)의 이연호(李連浩) 집으로 가서 군자금 3관문(貫文)을 징수하였다. 2월 8일 밤에는 화승총을 소지한 부대원 몇 명을 이끌고 영덕군 서면(西面) 산하동(山下洞) 사는 윤기만(尹基萬)의 집으로 가서 군자금 190냥과 마포(麻布) 한 필을 징수하였다. 또 2월 26일 밤에는 김성일·어준호·김원조 3명과 같이 청송군(靑松郡) 현동면(縣東面) 고적동(古赤洞)의 권영하(權寧夏) 집에 가서 엽전 137냥을 징수하였다.
이후 오두환은 체포되어 1909년 4월 20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강도상인(强盜傷人)·방화죄로 교수형을 선고 받았다. 선고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5월 29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으며, 6월 21일 고등법원에서도 상고가 기각되어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2017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