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781
한자 白南壽
영어공식명칭 Baek Namsu
분야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5년 2월 16일연표보기 - 백남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6년 - 백남수 영릉의진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50년 4월 5일연표보기 - 백남수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9년연표보기 - 백남수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 지도보기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영릉의진 중군장

[정의]

개항기 영덕 출신의 의병.

[가계]

백남수(白南壽)[1875~1950]는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대흥(大興)이다.

[활동 사항]

백남수는 대한제국기 궁내부주사(宮內府主事)를 역임하였다. 1906년 3월 신돌석영릉의진을 일으키자 영릉의진 중군장으로 가담하였다. 백남수는 큰 조카 백태진(白泰鎭)이 영릉의진에 강제로 차출되자 신돌석을 찾아가 조카를 대신하여 의병에 참가하게 되었다. 백남수는 9월 영양 주곡(注谷)에서 일본군 1종대(縱隊)와 격전을 벌였고, 10월에는 영해의 경무서를 격파하고 일경을 추방하였다. 11월에는 후군장이 되었다.

1906년 12월 영릉의진이 의병 73명, 총 33정, 환도 1개 육혈포 1정 등으로 무장하고, 겨울을 나기 위해 청송 보현사(普賢寺)로 이동하던 중, 청송군 이전평(梨田坪)에서 대구에서 파견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어 영덕군 율곡동(栗谷洞)에서 다시 일본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백남수를 비롯한 의병들이 각기 흩어졌다. 영덕으로 돌아온 백남수는 가족을 데리고 중율동(中栗洞)으로 이사하였으나, 1907년 체포되었다. 1907년 9월 4일 경상북도 재판소에서 유형(流刑) 10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9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