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7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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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鎭斗 |
영어공식명칭 | Nam Jindu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94년 2월 7일 - 남진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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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남진두, 영해면 3·1독립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19년 5월 10일 - 남진두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남진두, 대통령 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남진두,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영해면 3·1독립운동 |
출생지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355 |
활동지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남진두(南鎭斗)[1894~1919]의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건경(建卿)이다. 아버지는 남극만(南極萬)의 5대손인 남효백(南孝栢), 어머니는 신홍집(申弘輯)의 딸 평산신씨(平山申氏)이다. 1894년 2월 7일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355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18일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장터에서 영해면 3.1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영해면 3.1독립운동은 지품면 낙평리 교회 김세영(金世榮)과 구세군참위(救世軍參尉) 권태원(權泰源) 등에 의해 계획되었다. 김세영, 권태원 등은 3월 18일 영해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영덕군 영해면·병곡면·축산면·창수면의 기독교도와 농민층을 광범위하게 규합하였다.
남진두도 거사 계획을 전해 듣고 3월 18일 오후 1시경 성내리 장터에 결집하였다. 남진두는 3,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그리고 경찰주재소로 달려가 일본 경찰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위협하였다. 또한 주재소를 부수고 일본 순사로부터 모자와 칼을 빼앗았다. 이어서 공립보통학교로 행진하여 평소 일제 정책을 찬양하던 교사들을 규탄하고 건물을 파괴한 후, 일본인 소학교·우편소·면사무소를 차례로 공격하였다. 그리고 다시 주재소로 몰려가 건물 안에 걸려 있던 경찰복을 모두 찢어버렸으며, 비치되어 있던 장총 4정과 87발의 실탄을 빼앗아 파기하였다. 영해면 만세시위는 3월 19일까지 지속되었다.
3월 19일 오전 11시경 포항헌병대에서 일본 헌병 분대장과 6명의 헌병이 출동하였으나, 시위 군중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오후 5시경, 대구에 주둔한 일본군 보병 80연대에서 장교 이하 17명이 출동, 헌병들과 합세하여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시위대는 해산하였고, 많은 인사들이 체포되었다. 남진두는 피신하여 제2차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였으나, 4월 20일에 영덕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일제 경찰에 의해 잔인한 고문을 받은 끝에 5월 10일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