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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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禮州 |
영어공식명칭 | Yeju |
이칭/별칭 | 단양(丹陽),우시군,유린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배상현 |
제정 시기/일시 | 고려 초 - 예주 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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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지 시기/일시 | 1310년 - 예주목(禮州牧)에서 여러 목을 없애고 영해부로 개칭 |
개정 시기/일시 | 1259년 - 예주를 덕원소도호부로 개칭 |
관할 지역 | 예주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창수면|병곡면|축산면 |
[정의]
고려 시대 경상북도 영덕군 일대에 설치되었던 지방행정구역.
[개설]
예주(禮州)는 고려 초 설치된 지방행정구역이다. 중간에 덕원소도호부(德原小都護府)로 승격되었지만, 1310년(충선왕 2) 읍격 조정이 이루어지면서 영해부(寧海府)로 개칭되었다.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을 중심으로 창수면·병곡면·축산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예주가 설치된 시기와 경위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고려 초에 개칭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후삼국 통일 후 지방 호족들의 기여도나, 새롭게 확보한 지역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지방 사회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개칭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관련 기록]
『고려사(高麗史)』 권57 지리지 예주의 연혁조에는 "예주는 본래 고구려의 우시군(于尸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유린군(有隣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현종 9년[1018]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고종 46년[1259]에 위사공신(衛社功臣) 박송비(朴松庇)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승격시켜 덕원소도호부(德原小都護府)가 되었으며, 뒤에 승격시켜 예주목(禮州牧)이 되었다. 충선왕 2년[1310]에 여러 목(牧)을 정리하면서 영해부로 고쳤다. 별호를 단양(丹陽)이라 하였는데 이는 성종 때 정해진 것이다. 관어대(觀魚臺)가 있다. 속부(屬府)가 1개, 속군(屬郡)이 3개, 속현(屬縣)이 2개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경상도 영해도호부 편에는 "본디 고구려의 우시군인데, 신라에서 유린군으로 고쳤다. 고려에서 예주로 고쳐 현종 무오년에 방어사를 두었다. 또 고종 46년 기미에 위사공신 박송비의 내향이라 하여 올려서 덕원소도호부로 삼았다가, 뒤에 예주목으로 올렸으며, 충선왕 2년 경술에 여러 목을 없앰에 따라 영해부로 고쳤다. 조선 태조 6년[1397] 정축 6월에 비로소 진(鎭)을 두고 병마사(兵馬使)가 부사(府使)를 겸하게 하였는데, 태종 계사년[1413]에 예에 의하여 도호부로 고쳤다. 별호는 단양이다."라고 하였다.
[내용]
예주는 원래 고구려가 설치한 우시군이었으나, 이후 신라에 편입되었고 757년(경덕왕 16) 유린군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초 다시 예주로 개칭하였으며, 1018년(현종 9) 외적 방비 강화를 위해 방어사를 두었다. 예주는 고려 후기에 들어 출신 인물의 활동에 의해 읍격의 변화를 보였다. 이곳 출신 박송비가 이른바 무오정변(戊午政變)으로 공을 세우고 위사공신(衛社功臣)에 봉해지면서, 1259년 덕원소도호부로 승격된 것이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예주목(禮州牧)으로 승격되었다.
[변천]
1259년 덕원소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얼마 후 예주목으로 재차 승격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310년 여러 목을 없애는 조치에 따라 영해부로 고쳤다. 그 이유는 인적 연고에 따라 읍격을 승격시키다 보니, 읍의 규모에 맞지 않게 '목'으로 승격된 고을이 많았기 때문이다.
[의의와 평가]
예주의 존재는 인적 연고에 따라 읍명 및 읍격이 변화하던 중세 지방행정제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