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6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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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最訥 |
영어공식명칭 | Choi Nul |
영어음역 | Choi Nul |
영어공식명칭 | Choi Nul |
이칭/별칭 | 묵암(黙庵),이식(耳食)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종수 |
출생 시기/일시 | 1717년 - 최눌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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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서품 시기/일시 | 1730년 - 최눌 득휘장로에게 출가 |
출가|서품 시기/일시 | 1734년 - 최눌 만리대사에게 구족계 받음 |
몰년 시기/일시 | 1790년 4월 - 최눌 사망 |
출생지 | 최눌 출생지 - 전라남도 고흥군 |
활동지 | 순천 송광사 -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안길 100[신평리 12] |
성격 | 승려 |
성별 | 남 |
[정의]
조선 후기 순천 송광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승려.
[활동 사항]
최눌(最訥)[1717~1790]은 전라도 고흥 출신의 부휴계(浮休系) 고승이다. 밀양박씨이고, 자는 이식(耳食), 법호는 묵암(默庵)이다. 최눌은 14세 때인 1730년(영조 6)에 징광사 득휘(得輝) 장로(長老)에게 출가하고, 18세 때인 1734년에 만리대사(萬里大師)에게 구족계(具足戒)[불교 교단의 승려가 받는 계율로서 비구 250계와 비구니 348계]를 받았다. 19세 때인 1735년에 풍암(楓巖) 세찰(世察)[1688~1758]에게 경전을 배웠다. 이후 호암(虎巖)·회암(晦庵)·용담(龍潭)·상월(霜月) 등 여러 선지식을 두루 참방하고 영해(影海) 약탄(若坦)[1668~1754]에게 불교의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 1743년(영조 19) 봄에 풍암화상(楓巖和尙)을 다시 찾아가 대광사 영천암에서 수행하였다. 1750년(영조 26) 봄에는 송광사에서 영해대사(影海大師)의 화엄대회를, 1759년(영조 35) 가을에는 송광사에서 풍암대사(楓巖大師)의 화엄대회를 준비했다. 1765년(영조 41) 여름에 백암(栢庵) 성총(性聰)[1631~1700]의 비석을 징광사에 세웠고, 1766년에는 송광사에 비석을 세웠다. 1770년 봄에는 해남 표충원의 임무를 맡았다. 최눌은 1790년(정조 14) 4월 나이 73세로 송광사 보조암에서 입적했다.
[사상과 저술]
최눌의 비문에 따르면, 『화엄과도(華嚴科圖)』, 『제경문답(諸經問答)』, 『반착회요(盤錯會要)』 등 총 10권의 저술이 있다고 하였다. 현존하는 저술로는 『화엄품목(華嚴品目)』과 『제경회요(諸經會要)』가 있다. 비문에서 언급한 『제경문답』과 『반착회요』를 합친 것이 『제경회요』이고, 『화엄과도』는 『화엄품목』을 말한다. 그 외 글들은 『묵암집(默庵集)』으로 엮어 간행되었다.
이 외에도 화엄의 심성을 논한 『심성론(心性論)』이 있었다고 한다. 연담(蓮潭) 유일(有一)[1720~1799]의 『임하록(林下錄)』에 전하는 「심성론서(心性論序)」에 따르면, ‘모든 부처님과 중생의 마음은 각각 원만하여 일찍이 하나였던 적이 없다.’라고 하는 최눌의 주장과 ‘모든 부처님과 중생의 마음은 각각 원만하지만, 원래는 하나’라고 하는 유일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 일치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당시 청허계를 대표하는 유일과 부휴계를 대표하는 최눌이 심성의 일(一)과 다(多)에 대해 논쟁하여 두 계파 간의 사상적 대립을 드러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최눌이 그 논쟁의 내용을 『심성론』 3권으로 엮었지만, 당시 논쟁의 시빗거리가 되는데 불만을 품은 자들이 지금의 지리산 천은사(泉隱寺)에서 책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