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0330
한자 財政
영어공식명칭 Finance
영어의미역 Finance
영어공식명칭 Financ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욱

[정의]

조선시대 순천에서 중앙과 지방 관청의 운영을 위해 거두었던 조세의 내역과 그 변천.

[조선시대 순천 재정]

조선시대 순천의 재정은 크게 중앙에 상납하는 부분과 지방관청의 재원으로 활용되는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중앙 상납분은 조선 전기에는 전세, 공납, 군역으로 대별된다. 후기에는 대동법 시행으로 공납이 전세화 되면서 전정[토지에 부과되던 모든 조세를 일괄하여 수취하는 일종의 전결세 수취행정제도]과 군정[군사에 관한 군행정과 군재정의 총칭]으로 변화하였다. 여기에 환곡이 새로운 조세로 등장하였다. 순천의 지방 재정 역시 관둔전[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각 지방관청에 둔 둔전] 경영과 요역[국가가 백성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징발하는 수취제도] 동원을 통해 재원을 충당하던 방식에서, 대동법 시행 이후 대동미를 통해 운영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그러나 중앙재정 악화로 대동미 상납분이 늘어나면서 재정 부족을 만회하기 위해 잡역세(雜役稅)를 부과하고 식리전을 운영하며, 장시전이나 사모속(私募屬)을 활용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조선전기 순천부의 국세(중앙재정) 현황]

조선 전기 중앙재정은 흔히 ‘조용조(租庸調)’ 체제로 불린다. 즉 전세, 군역, 공납이 중앙에 상납하는 세원이었다. 전세는 세종 대 공법(貢法) 시행 이후 1결당 최고 20두에서 최하 4두까지 납부하였다. 이후 점차 1결당 4두나 6두로 고정되어 갔고, 1635년(인조 13) 영정법(永定法)으로 법제화되어 풍흉(豐凶)과 무관하게 1결당 4두[아주 비옥한 토지의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6두]를 거두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순천에서 중앙에 상납하는 전세액이 어느 정도인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추정은 가능하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순천의 토지 면적이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7,315결이었고, 임진왜란 직전에는 1만 결 정도였던 것으로 추산된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겪은 직후인 『승평지(昇平誌)』가 편찬되는 단계에서는 2,900결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때 쌀 859석과 콩 232석을 전세로 납부하였다. 이 수취로 조선 전기 순천부의 토지 규모를 감안하면 조선 초기의 전세를 짐작하는 데 참고가 될 것이다.

다음으로 순천에서는 농산물, 임산물, 수산물, 광산물 등을 망라한 36종류의 공납물을 중앙에 상납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범가죽·삵괭이가죽·여우가죽·잘·족제비털·칠·감·귤·석류·배·매화·분곽(粉藿)·꿀·밀[黃蠟]·대추·지치·죽순·상어·전복·홍합·붉은 큰새우·차[茶]·표고·목화·오죽·대방석,염매, 녹용, 천문동, 맥문동, 난향, 오징어뼈, 심황, 수포석, 백복령, 인삼 등 모두 36종이었다.

군역을 보면, 15세기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시위군이 17명, 수호군이 79명이었다. 당시 순천의 가호는 467호였고, 이 중 양반호를 제외한 상민호에서 96명의 상번(上番) 군역을 졌고 나머지는 봉족(奉足)이었다. 16세기 이후에는 군포 2필을 징수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 이후 상황은 『승평지』에 나와 있다. 충의위(忠義衛) 13명, 정로위(定虜衛) 88명, 기병 538명 등 상위 병종과 함께 보병 132명, 수군 535명 등 총 5,106명이 군역을 부담하고 있었다. 이는 세종 대와 비교하면 군역이 많이 증가한 것이었다.

[조선후기 순천부의 국세(중앙재정) 현황]

조선 후기 토지에 부과하던 전세는 상당히 늘어났다. 우선 임진왜란 당시 설치한 훈련도감의 운영을 위해 삼수미(三手米)를 신설하였다. 삼수미는 처음에는 1결당 2.2두를 거두었으나, 인조 때 2두를 감액하였다. 그리고 균역법 시행과 함께 수입 감축분을 보충하기 위해 토지 1결 당 2두를 거두는 결작[토지에 부과하던 지세]을 신설하였다. 이렇게 해서 조선 전기의 전세와 같은 액수인 4두의 세가 토지에 부가되었다. 이와 함께 토지에 부과되는 세금이 획기적으로 늘어나게 된 것은 대동법의 시행이었다. 공납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것인데, 공납을 없애는 대신 토지 1결당 12두를 거두었다. 이리하여 조선 후기 순천에서는 전세로 거두는 액수가 조선 전기에 비해 많이 증가하였다. 전세 수취량을 특정할 수 없기 때문에 시기별로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하겠다.

18세기 중반의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는 전세로 쌀 1,620석, 콩 822석, 삼수미로 쌀 602석, 대동미로 쌀 5,660석, 결작(結作)으로 돈 4,432냥을 거두었다. 18세기 말의 『부역실총(賦役實總)』에서는 전세로 쌀 2,562석, 콩 808석, 삼수미로 쌀 952석, 대동미로 쌀 5,271석, 통 106석, 결작으로 돈 4,542냥을 거두었다. 19세기 말의 『순천부읍지(順天府邑誌)』에서는 전세로 쌀 2,770석, 콩 648석, 삼수미로 쌀 631석, 대동미로 쌀 4,518석, 결작으로 쌀 469석을 거두었다.

공납은 대동법 시행으로 폐지되었지만, 순천부에는 여전히 진상으로 상당한 양이 부과되었다. 예를 들어 매달 진상하는 삭선 진상과 함께 설날에 올리는 정조진상, 단오진상, 동지진상, 그리고 왕과 왕대비 등의 생일에 올리는 탄일진상 등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군역은 많이 증가하였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순천부에는 좌수영에 소속된 수군 2,985명을 포함해 영(營)이나 부(府), 6진(鎭)의 군교·이속 및 각색 군액을 합하면 8,571명이었다. 당시 순천부의 남정이 1만 8,593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군역 부담이 매우 무거웠음을 알 수 있다. 균역법의 시행으로 군역 부담이 1필로 균일화되었다고는 하더라도, 부과되는 액수가 많았다. 이 때문에 백골징포나 황구첨정과 같은 병폐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순천 관아의 재정과 변천]

조선 정부의 관심은 중앙 재정의 원활한 확보에 있었다. 중앙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내역은 상세히 규정한 반면, 지방재정의 경비는 자율에 맡기는 측면이 강하였다. 그러나 지방재정 규모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지방 관아에서는 수령의 봉록과 일용비, 관청 운영비, 행정·군사비, 군기와 관사 수리비 등에 큰 비용이 필요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지방 재정을 위해 몇 가지 정책이 마련되어 있었다. 첫 번째는 관둔전(官屯田)[각 지방의 행정·군사·교통 기관의 운영 경비를 보조하기 위해 국가에서 설정했던 토지]이었다. 순천도호부에는 16결의 관둔전이 지급되었고, 연간 320~480석 정도의 수입이 있었다. 두 번째는 아록전(衙祿田)[수령과 도승 및 수운판관 등에게 나눠 지급한 토지]과 공수전(公須田)[관아의 접대비나 역(驛)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지급하던 토지]이었다. 이것은 수령의 경비와 관청 운영비에 충당하는 토지였다. 순천에는 아록전 50결, 공수전 15~20결이 지급되었고, 그 수입은 연간 280석에 지나지 않았다.

이외에 가호를 단위로 현물을 거두거나 노동력을 징발하기도 하였다. 땔감이나 숯 같은 것은 장정 1인당 일정액을 거두었다. 그리고 어물이나 닥종이 같은 것은 관에서 어살이나 저전(楮田)을 마련하고, 관속과 순천 백성들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생산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방식은 조선 후기에 크게 변화하였다. 관둔전이나 아록전 등은 거의 유명무실해졌다. 과전법의 폐지 이후 지주전호제가 급속히 확대되었다. 관에서 노동력을 동원하여 관둔전을 경작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이 때문에 조선 후기 들어 관둔전 등이 지방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없었다.

현물을 거두거나 노동력을 동원하는 방식 역시 조선 후기에는 변화하였다. 그 가장 큰 계기는 대동법의 시행이었다. 대동법은 현물을 생산하기 위해 백성들을 요역에 동원하거나 현물로 납부하는 방식을 전면 폐지하고, 대동미로 대체한 것이었다. 호를 단위로 부과하던 방식에서 토지 소유를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하였다. 토지 1결당 12두를 거두었고, 그중 일부를 지방 재정으로 남겨 두었다. 이를 유치미(留置米)라고 한다. 대동법 시행 당초에는 12두의 절반인 6두를 지방재정으로 남겨 두었다. 그러나 중앙재정이 악화되면서 점차 그 비중이 줄어들었다. 1729년 간행된 『신증승평지(新增昇平誌)』에서는 대동미 6,482석 중 822석만을 유치미로 순천부에 주었다. 1757년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는 1,211석으로 약간 증가하였으나, 『순천부읍지』에서는 다시 516석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이렇게 유치미가 줄어들자 지방 재정은 악화되었고, 이를 만회하려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던 각종 잡역을 잡역세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백성들에 대한 노동력 동원이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토지나 가호를 단위로 일정한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이었다. 『순천부읍지』에 의하면, 총 6,629결의 토지에서 1결당 3두씩 총 1,325석의 세수를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순천의 지방 재정도 다른 군현과 마찬가지로 점차 식리 위주로 바뀌어 갔다. 순천에서는 호방고, 민고 등 25종의 식리전을 운영하였다. 이를 통해 관속의 급료, 읍성과 관사의 수리비, 관용 물자의 구입이나 수리비, 관청 기구 운영비, 면리의 잡역비, 진영의 석탄가 등에 사용하였다. 『부역실총(賦役實總)』을 보면, 잡역세와 함께 상품경제 발전에 편승해 시장에서 세를 거두기도 하였다. 순천부에서는 한 해에 273냥의 장세전을 거두었고, 민고에서는 100냥을 거두었다. 이외에도 군정의 사모속을 통해 재정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순천부읍지』를 보면, 300명의 사모속을 두어 보가가 512냥이나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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