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13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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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居昌 地域 改新敎圈- 獨立運動 |
영어공식명칭 | Independent Movement of Protestant Churches in Geochang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상규 |
[정의]
경상남도 거창 지역 개신교권이 참여한 독립운동.
[지역적 상황]
1919년 3월 1일과 그 이후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은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 지배에 대한 비폭력적 항거였고, 동시에 다양한 형태로 전개된 민족 독립운동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이후 전국적으로 2개월, 길게는 1년 여에 걸쳐 거창을 포함한 전국적 운동으로 확산되었고, 해외에서는 만주 연해주 등으로 확대되었다. 여기서는 거창 지역 개신교권의 독립운동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독립 만세 운동]
서울에서 만세 운동이 시작된 후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는데, 3월 3일에는 부산과 마산에서 독립 선언서가 배포되었고, 개신교권의 경우 3월 9일경에는 함안의 칠원 교회에서, 11일에는 호주 선교부가 설립한 부산 일신 여학교에서, 21일에는 호주 선교부가 설립한 마산의 창신 학교와 의신 여학교 학생 중심으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13일에는 창녕과 밀양에서, 14일에는 의령, 통영에서, 그리고 18일에는 진주의 호주 선교부가 설립한 광림 학교 학생 중심으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처럼 진주를 비롯한 서부 경상남도 지방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나 합천, 초계, 함양, 안의 지방으로 확산되자, 거창에서도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주남선(朱南善), 오형선(吳亨善), 고운서(高雲瑞) 등이 중심 인물이었다. 이들은 1909년 거창 교회 설립에 관여했던 개신교 인물인 동시에 이 지역 교계 지도자들이었다. 이때 주남선은 형 주남재(朱南宰), 동생 주남수(朱南秀)와 함께 만세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함께 시위를 주도했던 오형선은 1919년 4월 『신한 별보(新韓別報)』라는 지하 신문을 제작했던 인물로서 이 지역 만세 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다. 이들 기독교 인사들은 3월 20일 독립 선언서를 인쇄하여 배포하고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김병직, 어명준, 정대필, 유희탁 등 거창 지역 인사들과 연합하여 대규모 시위로 발전했다. 주남선은 오형선과 고운서를 거창과 합천 지역 책임자로 맡기고 교회 청년들을 동원하여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국권 회복 운동에의 참여]
국권 회복 운동(國權回復運動)은 1913년 음력 1월 15일에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 안일암에서 결성된 비밀 결사체로서 서상일, 이시영, 박영모 등이 지도적 인사들이었다. 이 운동의 최대 과제는 국권 회복이었으나 이를 위한 군대 양성과 무기 구입을 위한 자금 확보를 일차적 과제로 추진했다. 이 운동은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3·1 운동이 발발하자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1919년 4월초에는 상해 임시 정부에 군자금 1500만 원을 모금하여 송금하였고, 모금 운동은 경상도 지역에서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거창 지역에서는 오형선과 주남선, 주남재와 주남수 형제가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1919년 8월에는 거창 교회 오형선을 비롯하여 김태연(金泰淵), 이덕생(李德生) 등이 독립 자금과 의용병 모집 혐의로 체포되는 등 수난을 당했다.
[서로 군정서 모금 활동]
국내에서 독립운동의 한계를 느낀 민족 지도자들은 근거지를 만주로 옮겨 본격적인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했는데, 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는 서간도 혹은 남만주에 있던 한국의 독립 혁명 단체였다. 서로 군정서에는 신흥 무관 학교 졸업생들이 주로 참여하였다. 서로 군정서는 1919년 한족회(漢族會)와 함께 조직된 군정부가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지휘 아래 있을 때부터 불렸던 이름이다. 1922년에는 대한 통군부에 통합된다.
서로 군정서의 항일 무장 투쟁을 돕기 위한 자금 모금 활동이 국내에서 은밀하게 전개되었는데, 거창 지역 지도적 개신교도인 주남선, 오형선 고운서는 이 운동에 깊이 관여하였다. 이 점에 대한 일제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이덕생 및 김태연은 대정(大正) 8년(1919) 8월 일자 불상[日不詳] 경상남도 거창군 피고 오형선 방에서 오형선, 고운서, 주남고와 회합하여 국권 회복 운동의 군 자금 및 의용병을 모집하여 만주 군정서(軍政署)에 파견할 것을 모의하여 대정(大正) 8년 8월[일자 불상] 거창군 거창면의 피고 신도출(愼道出)에게서 군자금 813원을 갹출하여 주남수(朱南守), 이사술(吏四述), 이성년(李聖年) 및 백기주(白基周) 등 네 명을 의용병으로 가담시켜 김태연의 인솔로 만주 군정서에 파견하고, 또 주남수와 전기(前記) 이덕생 외 네 명의 모집에 응하게 하여 오형선 및 송명옥(宋明玉)과 공모하여 오형선 방에서 『신한 별보』라 칭하는 불령 사상(不逞思想)의 선전 및 동지 규합의 의미를 가지고 불칭(不稱) 문서 수만 부를 등사하여 피고 정초현(鄭草鉉) 및 이갑수(李甲銖), 안덕보(安德保), 유진성(柳鎭成) 등 4명에게 5부 15부를 배포한 일이 있어 소할(所轄) 거창서에서 취조한 결과 제령(制令) 및 출판법 위반으로 대정(大正) 10년 1월 8일 시건을 송치함.”
위의 기록을 보면 거창 지방 개신교 지도자들은 서로 군정서에 보낼 자금 모금 활동과 의용병 파견에 깊이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으로 주남선은 이덕생, 김태연 등 13명과 함께 1921년 1월 검거되어 의성 경찰서, 대구 형무소로 이동 수감되었다. 주남선은 1921년 3월 4일 재판에서 이른바 ‘대정 8년 제령 제7호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징역 1년 선고를 받고 복역 중 1921년 12월 29일에 부산 감옥 진주 분감(晋州分監)[흔히 진주 형무소로 불림]에서 가출옥하였다. 이때는 만기를 3개월 앞둔 때였는데, 주남선의 투옥 기간은 약 1년이었다. 이상과 같은 활동을 고려해 볼 때 주남선을 비롯한 거창 지방 기독교계 인사들이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거창 지방의 기독교 세력은 만주 지역 독립운동 세력과 연대하는 통신망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권서 활동과 군자금 모금 운동]
‘권서’란 책을 권한다는 의미인데, 지역을 순회하며 성경책을 보급하는 일을 의미한다. 권서인(勸書人)은 이 일에 동참하는 이들을 칭한다. 우리나라에서 권서 혹은 권서인은 대영 성서 공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가 한국에서 성경 반포 사업을 벌이면서 생겨난 이름인데, 거창 지역 기독교계 인물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주남선은 권서인으로 활동했다. 그런데 권서인들은 단지 성경만 보급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을 순회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항일 민족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3·1 운동이 발발했을 당시 독립운동에 대한 정보를 이곳저곳으로 전파한다는 이유로 일제가 권서 활동을 심하게 단속했고, 이들을 탄압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특히 3·1 운동 이후 권서인들은 지역 순례를 이용하여 군자금 모금에 적극 동참하였다. 거창 지방에서 대표적인 사례가 주남선이었다. 주남선은 이미 1913년부터 1916년까지 권서인으로 활동했는데, 독립군 지원을 위한 군자금 모금 운동으로 ‘대정 8년 제령 제7호 위반’이라 하여 구금되었다가 1921년 12월 가석방된 뒤 다시 권서인으로 활동하였다. 곧 주남선은 1923년부터 권서인으로 활동하며 거창군 내와 인근 함양군, 산청군, 합천군, 진주시 등을 순회하며 권서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독립 단체들과 관련을 맺고 은밀히 군자금을 모금하며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권서인 출신 독립운동가가 적지 않았다.
[신사 참배 거부 운동과 일제에 대한 저항]
일제하에서 한국 교회가 당한 가장 큰 수난은 신사 참배 강요였다. 신사(神社)는 일본의 토착 종교인 신도(神道) 의식을 행하는 종교 시설로서, 신사 참배는 일본의 국조신(國祖神)인 천조 대신[아마테라스 오미카미, 天照大御神]과 역대 천황을 신으로 섬기는 일종의 민족 종교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는 한국인들에게 1935년부터 신사 참배를 강요했는데, 이것은 우상 숭배 강요였고, 신교(信敎)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위반하는 요구였다. 신사 참배 강요는 비신자들에게는 민족적 자존심 외에는 크게 문제되지 않았으나 기독교회와 신자들에게는 심각한 현안이었으므로 거세게 저항했다. 이런 저항은 결과적으로는 일제의 식민 정책을 반대하는 것이었으므로 민족 독립운동으로 간주되었다. 그러하였으므로 해방 후 신사 참배를 반대하여 순교했던 주기철 목사와 경상남도 지역의 지도적 인사였던 주남선 목사 등에게 국민 훈장을 추서하였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신사 참배 강요는 단순히 종교적인 문제만은 아니었다는 점은 신사 참배를 강요한 배경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일제는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 황민화 정책(皇民化政策), 국민 정신 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이라는 이름 하에서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는데, 이것은 일본의 토착 종교이자 군국주의의 표현인 신도를 통해 한국인의 정신을 일본화하겠다는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래서 일제는 1920년대 이후 소위 일면 일신사(一面一神社) 정책을 수립하여 전국 각처에 신사를 건립하고 1935년부터 참배를 강요하게 된 것이다. 이때 많은 이들이 일제의 강압에 저항하고 투쟁했는데 거창 지역의 대표적인 인물이 주남선 목사였다.
신사 참배 문제는 우가키[宇垣] 총독 후임으로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취임하는 1936년 8월 이후 더욱 심각해졌다. 미나미는 각급 사립 학교에 신사 참배를 강제하고, 교회와 교회 기관 그리고 교회 지도자에게도 신사 참배를 요구했다. 1937년 7월에는 중일 전쟁이 발발하였고, 9월 6일을 애국일로 정하여 일본 국기 게양, 동방 요배, 신사 참배를 요구하였다. 10월에는 황국 신민 서사(皇國臣民誓詞)를 제정하였고, 12월에는 천황의 사진을 각급 학교와 기관에 배부하고 경배를 요구하였다. 1938년 2월에는 전쟁 수행을 위해 특별 지원 제도를 제정하였고, 3월에는 조선 교육령을 개정하여 조선어[한글] 사용을 금지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교회에 대한 탄압도 가중되었다. 거창 교회 담임 목사였던 주남선은 목회자의 관점에서 신사 참배 요구는 우상 숭배 강요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신앙적 양심과 신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조치이자 교회에 대한 탄압이었기 때문이다.
거창 경찰서는 1938년 4월부터 공식적으로 거창 교회와 주남선 목사에게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해 6월경 주남선 목사는 거창 가조리(加祚里) 기도실에서 2일간 금식 기도한 후부터 거창 지역 교회들을 순방하면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주남선 목사는 거창 지역의 대표적인 신사 불참배론자로 지목되어 요주의 인물로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곧 주남선 목사에게 금족령이 내려졌다. 사퇴 압력을 받은 주남선 목사는 1938년 9월에 교회측 최고 의결 기구인 당회(堂會)에 사면서를 제출하였다. 1938년 12월에는 공식적으로 거창 교회 위임 목사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에도 주남선 목사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었으나 신사 참배를 반대하고 또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1940년 1월 3일에 거창군 거창읍 하동(下洞) 15번지 자신의 거주지에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협의하고, 그달 중순에는 함양읍 교회를 방문하여 황보기(皇甫基) 장로에게 신사 참배 반대를 격려하고, 1940년 3월 27일에는 진주 봉래정 황성호(黃聖浩) 집에서 이주원, 이현속(李鉉續) 등과 회합하여 반대 운동을 협의하고, 또 경상남도 산청군 단계면 단계(丹溪) 교회 박명준(朴明俊), 합천군 가회면(佳會面) 장대(張台) 교회 김영숙(金永淑), 합천군 삼가면(三嘉面) 삼가 교회 강석황(姜石璜), 진주 봉래정 황원택(黃原澤), 하은혜(河恩惠), 김해군 대저면의 심문태(沈文泰), 부산 해운대 교회의 구재화(具載和), 함양군 지곡면(池谷面) 시목리(柿木里) 교회의 김종대(金鍾大), 함양군 안의읍 교회 장봉상(張鳳相), 개평(介坪) 교회의 정팔현(鄭八鉉), 시목리 교회 윤봉기(尹鳳基), 안의 교회 정은혁(鄭恩赫) 등을 방문하고 신사 참배의 부당성을 고취하는 등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중 1940년 7월 16일에 주남선 목사는 진주 경찰서 고등계 형사에 의해 체포되었고, 7월 17일에는 진주 경찰서 유치장으로 압송되었다. 1941년 3월 13일에는 부산 경찰서로, 1941년 7월 11일에는 평양 형무소로 이감되어 5년간 투옥되어 있다가 19명의 동료와 함께 1945년 8월 17일에 출옥하였다. 옥중에서 주남고(朱南皐)라는 본래의 이름을 주남선(朱南善)으로 개명하였다. 주남선 목사의 신사 참배 반대 투쟁은 민족 운동의 일환이었고, 그 점을 인정하여 그는 국민 훈장을 추서받았고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거창 지역 기독교인들의 독립운동 성격]
거창 지역 개신교 지도자들은 일제의 침탈로 우리 민족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독립운동에의 참여를 당연한 의무로 여겼다. 그것이 기독교인의 신앙 정신과 배치되지 않는 활동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1919년 3월 20일에 거창읍 내에서와 그 주변 지역 만세 운동을 주도하고, 국권 회복 운동과 서로 군정서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모금 활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또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에 저항하며 일제에 대항하며 투쟁했는데, 이런 일련의 활동도 기독교권의 민족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