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9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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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居昌歌 |
이칭/별칭 | 「거창 별곡」,「아림 별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작품/민요와 무가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신용균 |
형성 시기/일시 | 1840년대 - 「거창가」 거창 유생 윤치광이 창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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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록지 | 「거창가」 이본 13종 - 전국 각지 |
가창권역 | 거창 박물관 소장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정장리 |
성격 | 민중 가사 |
기능 구분 | 저항가 |
형식 구분 | 가사 문학 |
박자 구조 | 4·4조 |
[정의]
조선 후기 거창의 유생 윤치광이 거창 부사의 학정을 비판한 저항 가사.
[개설]
「거창가」는 탐관오리 이재가의 학정을 비판한 4·4조의 가사 문학 작품으로 「거창 별곡」, 「아림 별곡」이라고도 불린다. 이재가는 1838년(헌종 43)부터 1841년까지 거창 부사를 지냈던 인물이다.
[채록/수집 상황]
「거창가」 필사본은 현재 거창 박물관에 1부가 소장되어 있으며, 그 밖에 전국 각지에서 13개의 이본이 전해온다. 「거창가」는 1840년대 창작된 후 필사, 암송을 통해 전국에 널리 퍼져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저항 가사가 되었다.
「거창가」의 저자는 거창의 유생 윤치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윤치광은 17세에 거창 부사의 학정을 비판하는 청원서를 지어 올렸다가 거창 부사에게 고난을 당하였다. 이 청원서가 ‘거창부 폐장(居昌府弊狀)’이었다. 「거창가」의 내용이 이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윤치광이 이 폐장을 토대로 「거창가」를 지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구성 및 형식]
전반부 「한양가」 다음에 「거창가」가 이어진다.
[내용]
「거창가」의 첫머리는 “어쩌다 우리 거창 운세가 불행하여 온 고을 가난하여 만민이 목마르다 [중략] 이재가 어인잰고 저재가 어인잰가 거창이 폐창되고 재가가 망가로다.”로 시작한다[현대문으로 고침]. 저자는 여기서 “이재가가 도대체 어떤 자이기에 그가 거창 부사로 온 후 거창은 폐허로 변했고 모든 집안이 망하게 되었는가.” 하고 거창 부사 이재가를 비판하고 있다.
「거창가」는 지방관의 부정부패와 수탈, 학정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 내용은 ‘거창부 폐장’에 실려 있는 열네 가지 폐단[6폐, 3고, 2원, 1변, 추가할 것 2가지]으로 요약된다. 여섯 가지 폐단은 환곡, 전세, 군포, 관청세, 창고세, 천막세의 부정이며, 세 가지 고통은 남용되는 장살, 부녀자의 억울한 죽음, 민가 재산 약탈이다. 두 가지 원망은 농민의 소 약탈, 세금의 사전 강제 징수이고, 한 가지 변고는 향청 자리다툼이다. 그 밖의 두 가지는 향교, 서원 관련 비리이다.
「거창가」는 이재가의 학정을 구구절절 구어체 가사로 풀어냈다. 삼정의 문란상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실감나게 비판했고, 경상도 감사가 지역민의 청원 내용을 거창도호부 향리에게 조사하도록 하자 이를 “부처에게 서양에 대해 묻는 격[問佛西洋]”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거창 부사가 지역민이 저항할 때 한유택, 정치광, 김부대, 강일상을 곤장 쳐 죽인 일, 주민들이 회곡과 향회로 저항할 때 대표자 이우석에게 곤장을 치자 이우석의 노모가 자식의 죽음을 보다 못해 목매어 죽은 일, 적화 면장이 양반 부인의 손을 끌어내 세금을 독촉하자 그 부인이 자결한 일, 겨 섞은 환곡을 야밤에 나누어 준 일, 도산 서원 제물인 대구를 빼돌려 봉물로 부친 일, 심지어 경상 감사를 대접하고자 멀리서 음식과 요리사를 구해 온 일까지 구체적으로 묘사되었다.
「거창가」는 내용뿐만 아니라 문학적 표현도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전국 농민들의 공감과 공분을 얻기에 충분했다. 그리하여 1840년대 창작되어 민간에서 암암리에 암송되다가 1962년 임술 농민 봉기 때 완성되어 대중 선동의 기능을 하였다. 그때 전국에 퍼진 「농민가」가 현재 남아 있는 「거창가」 이본이다. 「거창가」는 내용과 표현 양 측면에서 조선 후기 저항 가사의 백미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창작되어 전국에 퍼진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저항 가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