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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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慎道晟 |
영어공식명칭 | Sindosung |
이칭/별칭 | 애수(哀愁)의 정치인 |
분야 |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하유식 |
[정의]
국회 의원과 경상남도 도지사, 국토 통일원 장관을 역임한 거창군 위천면 출신의 정치학자이자 정치인.
[개설]
신도성(慎道晟)[1918~1999]은 거창군 위천면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 제국 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연희 전문학교 교수, 서울 대학교 정치과 주임 교수, 이화 여자 대학교 정치 외교학과장,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을 지냈다. 1954년 거창에서 제3대 국회 의원에 당선되었고, 1959년 제7대 경상남도 도지사, 1974년 제4대 국토 통일원 장관을 역임하였다.
[활동 사항]
신도성은 1918년 3월 7일 거창군 위천면 대정리에서 태어났다. 서울 사립 중앙 고등 보통학교[현 중앙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했으며, 일본 도쿄 제국 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연구하였다.
신도성은 1945년 9월에 창당된 한국 민주당의 문교부에 소속되어 문교부장 김용무(金用茂), 부원 양원모(梁源模), 양주동(梁柱東), 현제명(玄濟明), 오종식(吳宗植) 등과 교육 정책을 마련하는 데 기여하였다. 연희 전문학교 조교수, 서울 대학교 문리대 정치과 주임 교수, 이화 여자 대학교 정치 외교학과장 등을 지냈다. 『동아 일보』 논설 위원과 국방부 전사 편찬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54년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1955년 신태환, 유기천, 변시민과 함께 문교부 검정 중등 사회 생활과 교과서 『공민』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신도성은 1950년 제2대 국회 의원 선거 때 거창군에 입후보하였지만 사퇴하였다. 1951년 김성수 부통령의 비서관으로 임명되어 정계에 입문한 신도성은 독재 정치를 지양하는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줄곧 주장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민주 국민당 후보로 거창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선 후 민주 국민당 선전부장으로 활동했으나 혁신계 조봉암(曺奉巖)의 포섭 문제를 두고 찬반으로 대립하는 과정에서 1955년 3월 민주 국민당을 탈당하였다. 신도성은 민주 국민당 탈당 당시 자유당 입당설이 나돌아 ‘변절 정치인의 모델’이라는 의혹을 샀지만, 1956년 3월 조봉암의 진보당 추진 위원회에서 창당 발기 취지문, 강령, 정책 등의 작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진보당 추진 위원회에서도 곧 탈퇴하여 당적을 두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고아가 되어 정계 유랑의 길에 또다시 오른 신도성에 대해 "애수(哀愁)의 정치인"이라고 언론은 평가하였다. 신도성은 철저한 내각 책임제 정부 형태의 헌법 개정안을 독자적으로 추진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신도성은 1959년 11월부터 1960년 4월까지 관선 제7대 경상남도 도지사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경상남도 도지사 재직 당시 1960년 3·15 부정 선거와 김주열 사망 사건에 연루되어 4월 혁명 후 구속되기도 하였다. 1961년 2월에는 「반민주 행위자 공민권 제한법」 제10조에 의해 자동으로 공민권이 제한되었다. 이후 1974년부터 1975년까지 제4대 국토 통일원 장관으로 활약하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야당 시절 대북 정책 자문역으로 활동하였고, 평화 민주당 고문을 지냈다. 1990년 국토 통일원 고문을 역임하였고, 1991년 신민당 상임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95년 서울 중앙 고등학교 개교 87주년 기념식에서 ‘올해의 자랑스러운 중앙인’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1999년 9월 6일 인천 길 병원에서 오랜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신도성의 저서로는 『정가의 낙수(落穗): 신도성 수상집』(관동 출판사, 1977)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