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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발굴을 위한 이우장학회를 조직하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C010204
한자 人才發掘- 爲- 伊友奬學會- 組織-.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여수경

[정의]

인재발굴을 위한 이우장학회를 조직하다

[정대향민 이우 여상지선생 기념비를 조성하다]

헐티로에서 청도 방면으로 올라가는 길목 바깥매남을 지나면 심하게 꺾어지는 도로에 직면한다. 이후 직선 도로에 들어서면 바로 우측 용계천을 넘어가는 작은 교량과 함께 입구 작은 문이 설치되어 있다. 입구에는 어떤 안내문도 없어 알지 못한다면 쉽게 지나치기 일쑤이다. 입구 닫혀 있는 쇠문과 주변 잘 정리된 시설로 추정하건데 관리가 되고 있는 기념비 정도로 생각하였다.

높이 약 2m의 비 전면 ‘이우성주여씨휘상지기적비(伊友星州呂氏諱尙知紀績碑)’라 각석되어 있다. 기념비 ‘아래에는 이우선생의 비전에 바치는 글’이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문구가 각석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1974년 정대향민 일동이라는 글귀가 확인된다.

이우선생의 비전에 바치는 글

정대마을 향민들은 온 정성을 모아 이우 여선생의 공적을 찬양하는 비를 세우고 삼가 마음의 이 글을 바칩니다. 회고하면 이 산간벽지의 향리는 어리석고 순한 향민들이 음침하게 살아가던 외진 곳이 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마음은 평화롭고 아담한 낙원의 향리로 발전해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이우선생의 노력 그리고 정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적은 떠난 후에야 안다더니 과연 오늘 선생의 비전에 서니 그 고마움이 가슴에 젖어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언제나 온화한 모습의 선생은 향리의 공사는 물론이요 향민들의 사사로운 불행에도 따사로운 마음으로 어루만져 주시고 어떤 역경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마음에 담아 주셨습니다. 때로는 밤이슬을 맞아가며 숙식도 잊은채 마을의 후미진 곳을 찾아 아픔을 같이 하여 주셨고 향민들의 깨우침을 위해 학당을 마련하고 좁은 길도 손수 넓히고 다듬는 정성과 노력 그리고 오직 정대의 복지만을 생각하시던 선생의 일념은 우리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눈물겹게 했습니다. 오늘의 정대를 보십시오. 저 산 기슭의 평화로운 향리 힘차게 살아가며 내일을 기약하는 활기찬 향민 그리고 활발한 발걸음으로 배움터로 향하는 의욕에 찬 어린이들의 영롱한 눈빛 이것이 바로 이우선생의 생전에 숙인이 아니였습니까. 오늘의 이 비전에 서며 날로 전진해 가는 향리의 오늘은 오직 이우선생이 계셨기 때문이라고 진정한 마을으로 외침니다. 또 우리 후손들이 대대로 고마움을 잊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에 이 글을 새깁니다. 우리 향민들은 불행하게도 지도자를 잃었지만 선생의 생전 유지를 받들어 더 알차고 활기찬 정대로 발전시키고 꿈에 고향으로 가꾸어 갈 것을 다같이 다짐합니다.

서기1974년 4월 22일 정대향민일동

1942년 일제강점기 정대리 일대 학교를 세우기 위해서 장학회를 조직했다고 하는 여상지 선생을 기리기 위해 주민들이 세운 기념비이다.

[국어강습소에서 이우장학회로]

여상지 선생이 주축이 되어 세운 ‘이우장학회’는 일제강점기 이미 그 싹이 시작되었다. 최근 재단법인 이우장학회가 찾아낸 ‘장학계안(獎學契案)’에 따르면 장학회의 설립자인 여우균 이사장(2014년 5월 작고)의 부친인 여상지 선생이 1942년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 일대에 학교를 세우기 위한 장학회를 조직했음이 확인되었다. 당시 여상지 선생은 일제강점기 가창면장을 지낸 허동구 면장을 찾아가 오랜 상의 끝에 허락을 얻은 후 정대리 마을 주민 10여명과 함께 목재를 구해 건물을 짓고 보통학교 과정의 국어 강습소를 세웠다. 당시 가창면의 유일한 학교였던 가창소학교가 위치했던 용계리와 정대리의 거리는 약 50리(약 20km) 떨어져 정대리를 비롯한 일대 학생들은 학교에 갈 수 없었던 실정이었다. 이에 여상지 선생은 정대리 마을 주민과 함께 힘을 모아 일대 최초의 국어강습소를 세우고 청도에서 최재영 선생을 모셔와 글을 가르치게 했는데 이때 참석한 학생들의 수가 100여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2002년 여상지 선생의 아들 여우균 이사장은 부친의 호인 이우를 따서 장학회를 설립하는데 사재 10억원을 출연하여 부친의 평소 유지인 장학정신을 그대로 이었다. 이우장학회의 이사장이자 ㈜화남피혁의 창업주이기도 한 여우균 이사장은 설립 당시 10억원의 사재를 출연했지만 이후 2004년 10억원, 2008년 10억원, 2010년 3억원, 2011년 20억원 등 모두 53억원의 사재를 출연한 데 이어 작고하는 그 순간까지 현금 9억원과 상당한 금액의 부동산을 출연하였다. 이러한 사재 출연으로 이우장학회는 전국 읍면 단위 중에서는 장학기금의 규모가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재단이 되었다. 이후 이우장학회는 2004년 제1회 장학생 28명에게 3천950만원의 장학금을 수여한 것으로 시작으로 2008년에는 50여명에게 1억450만원 지급하는 등 2014년까지 500여명에게 약 14억 원의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참고 문헌]

매일신문, ‘달성 이우장학회 73년 역사 기록한 장학계안 발견’(2015년 2월 23일)

영남일보, ‘여우균 화남피혁 회장, 이우장학회 이사장 별세’(2014년 5월 31일)

영남일보, ‘이우장학회, 11년째 고향 후학에 속 깊은 사랑’(2014년 2월 14일)

대구용계초등학교 홈페이지

[정보 제공자]

김0생(남, 1940년, 달성군 가창면 정대1리 이장)

김0호(남, 1945년,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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