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A02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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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洛東江 堤防工事- 富農-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마을/마을 이야기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교항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경용 |
[정의]
낙동강 제방공사와 부농의 꿈
[낙동강 범람과 지역 전설]
‘옥공 제방(玉工 堤防)’, ‘논공제(論工堤)’라고도 일컫는 낙동강 호애 제방(洛東江 湖涯 堤防)은 옥포읍 다리목 마을에서 논공면 금포리(金圃里)까지의 낙동강 제방이다. 1960년대 제방공사로 일대의 들판이 농토로서의 제 역할을 하기 전까지는 낙동강이 자주 범람하여 3년 걸러 1년만 배곯지 않고 먹을 수 있어도 퍽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이곳에 태어나서 시집가기 전까지 쌀 두 말을 먹을 수 있는 처녀가 드물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회자된다.
비가 조금만 많이 내려도 낙동강 물이 범람하여 애써 가꾼 벼논에 ‘물을 담아버리기’ 일쑤였다. 이는 제대로 된 벼농사가 어려웠다는 반증이다. 너도나도 살기가 고단했던 시절, 그만큼 제방 축조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낙동강 제방공사는 196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달성지역의 김성곤(金成坤) 국회의원은 ‘농지 보존 사업’의 일환으로 제방공사를 추진하여 일대 농민들의 경제적 안정을 꾀하고자 했다. 법적 하천의 제방공사로는 막대한 예산 문제로 추진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화옥 제방, 옥공 제방]
달성군 관내 낙동강 제방공사는 화원에서 논공까지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화원에서 옥포읍 간경리, 본리동까지 추진되었는데, 이를 ‘화옥(花玉) 제방’으로 일컬었다. 다음에는 이를 이어서 옥포읍 다리목 마을에서 논공면까지 추진하여 ‘옥공 제방’으로 이름 지었다.
이러한 제방공사는 동화건설 회사에서 맡아 했다. 공사 과정에는 간경, 본리, 교항, 신당, 강림, 시저 등 낙동강 유역의 마을 사람들이 인부로 참여했다. 일일 상시 투입 인력이 300여 명이나 됐다. 당시에는 포크레인이나 불도저를 비롯한 첨단 건설 장비들이 부족하여 대부분의 공정은 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인부들이 임금 대신 밀가루를 받았다고 해서 ‘밀가루 공사’라는 말도 나돌았다.
다리목 마을에서도 매일 수십 명씩의 사람들이 제방공사장에서 일했다. 농토가 없거나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주로 참여했다. 흙을 파서 운반하는 힘든 작업이므로 일꾼들은 대부분 남자들이었다. 이른 아침 시작해서 어두워질 무렵까지 일했다. 아침과 점심 등 하루 두 끼니의 도시락을 지참해 다녔다. 이렇게 일한 하루 일당은 5천원이었데, 당시 시세로 쌀 닷 되 가치가 채 못 되었다.
[토차를 이용한 제방공사]
낙동강 제방공사는 마가들 구릉지의 흙을 파내 강둑을 쌓는 형식이었다. 흙은 1.5m 높이의 토차(土車) 레일 2개를 이용하여 운반했다. 토차는 이어 매단 여러 개의 짐칸과 화차(火車)로 구성된다. 인부들은 강안에서 괭이나 삽 등으로 흙을 파서 토차에 실어주거나 운반해온 흙을 강둑에 퍼내는 일을 했다. 일의 능률을 높이려고 때로는 이른바 ‘돈내기 식’의 작업도 이루어졌다, 토차 레일은 이후의 경지 정리 작업에서도 활용됐다.
1960년 시작된 낙동강 제방공사는 4년 동안 계속됐다. 제방공사 작업은 무더운 여름과 땅이 얼게 되는 겨울을 피해 봄철 동안 집중되었다. 일당은 많지 않았지만, 없는 사람들은 노동으로 돈을 벌 수 있어 가계에 상당한 보탬이 됐다. 제방 축조로 마음 놓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결혼 직후부터 제방공사장에서 일했던 김덕공(86세)은 튼튼한 제방이 만들어진 것에 대해 뿌듯한 마음 가득하다.
“제방공사로 둑에는 찻길이 뚫릴 정도가 됐고, 홍수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최근에는 강변 자전거 길도 만들어지고요. 뭐니 뭐니 해도 마을 사람들이 부자가 됐다는 것입니다.”(김0공)
[제방공사 이후 경지 정리도]
낙동강 제방공사 이후에는 곧바로 경지 정리 작업이 실시됐다. 예산은 정부 지원과 지방 부담금으로 충당되었다. 지방 부담금은 농지 소유주들이 수로와 도로 개설 용도로 활용되는 땅을 1천 평 당 75평 규모로 자부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해서 1964년 경지 정리 작업이 완료됐다.
예산 부족 때문에 300정보의 땅을 200정보의 공사비로 경지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러다 보니 농수(農水)가 골고루 공급되지 못하거나 모래 둑이 무너져 수로가 막히기도 했다. 대비책으로 수로를 다지는 흙 가마니만 연간 4천 여 장이나 소요되었다. 경지 정리 작업이 끝나고 2~3년이 지난 1966~1967년이 되어서야 제대로 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경지 정리와 수로 시설까지 갖추게 되자 마가들은 옥답으로 탈바꿈했다. 이전에는 콩과 보리 정도만 재배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벼농사를 마음 놓고 지을 수 있었다. 많은 농지가 생김으로써 다리목 마을 사람들은 비로소 부농의 꿈을 실현할 수 있었다.
[참고 문헌]
달성 마을지 편찬 위원회, 『달성 마을지』(달성 문화원, 1998)
[정보 제공자]
김0린(남, 1930년생, 대구 광역시 달성군 옥포면[현 옥포읍] 교항리 다리목 마을 전 이장)
김0공(남, 1932년생, 대구 광역시 달성군 옥포면[현 옥포읍] 교항리 다리목 마을)
김0욱(남, 1953년생, 대구 광역시 달성군 옥포면[현 옥포읍] 화원읍, 전 달성군청 건설과 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