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10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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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成坤 |
영어공식명칭 | Gim Seonggon |
이칭/별칭 | 성곡(省谷)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하리 85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임경희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출신의 정치인·경제인·언론인.
[가계]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성곡(省谷). 아버지 김광도(金光度)와 어머니 김봉옥(金鳳玉)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김성곤(金成坤)[1913~1975]은 1913년 경상북도 달성군 현풍면 하동 85번지[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하리 85]에서 태어났다. 1922년 현풍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가, 1925년 대구로 이사하여 달성 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다. 1928년 서울 휘문 고등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가, 1929년 대구 고등 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는데, 재학 중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연루되어 퇴학당하였다. 서울 휘문 고등 보통학교로 옮겼지만 학생 사건에 걸려 다시 퇴학당하고, 1933년 뒤늦게 서울 보성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 보성 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하여, 1937년 졸업하였다. 졸업 후 잠시 대구부청(大邱府廳)과 대구 상공 은행에 근무하다가, 1939년 비누 공장인 삼공 유지 합자 회사를 설립하였으며, 1945년 『영남 일보』 창간에 참여하였다.
김성곤은 1948년 서울에서 고려 화재 해상 보험과 금성 방직을 설립하였다. 6·25 전쟁으로 금성 방직 안양 공장이 소실되었지만 구사일생으로 피난하여, 대구에서 금성 염색 공장을 설립하였다. 1952년 『동양 통신』을 창간하고, 1954년 『연합 신문』을 인수하였으며, 1954년 금성 산업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금성 방직도 재건하였다. 1956년 태평 방직과 아주 방직을 인수하였으며, 1958년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하였다. 1959년 국민 학원[현 국민 대학교]과 고향의 현풍 학원[현 현풍 중학교]을 인수하였고, 1960년 대한 유도회 회장에 피선되었다. 1961년 국제 신문 편집인 협회[IPI] 정회원이 되었고, 1962년 쌍용 양회 공업(주)를 설립하면서 재벌의 위치를 굳혔다.
김성곤은 1961년 5·16 군사 정변 후에 민주 공화당에 입당하였고, 1963년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제6대 국회 의원 선거에 당선되면서 공화당 실력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965년 성곡 언론 문화 재단·성곡 학술 문화 재단을 만들었으며, 이후 제7대 국회 의원과 제8대 국회 의원을 거치면서 국회 재경 위원장, 공화당 재정 위원장, 공화당 중앙 위원장을 역임하고, 공화당의 이른바 '당 4역'으로 집권 정당을 이끌었다. 그러나 1971년 총선 직후에 오치성이 중심이 된 반(反) 4인 체제와 대립하여, 10·2 항명 파동의 책임을 지고 정계를 떠나야 했다. 김성곤은 약 1여 년 외유를 다녀온 후인 1973년 대한 상공 회의소 회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74년 대한 양회를 인수하고, 한국 신문 연구소 회장에 취임하는 등 활동을 재개하다가 1975년 갑자기 타계하였다.
[묘소]
김성곤의 묘소는 국민 대학교 뒷산에 잠시 마련되었다가, 1984년 강원도 평창군 도암면 용산리 발왕산 기슭으로 이장되었다. 다시 2014년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으로 재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김성곤에게 국민 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