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9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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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致烈 |
영어공식명칭 | Kim Chiyeol |
이칭/별칭 | 서봉(西奉)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출신의 관료.
[가계]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서봉(西奉)이다.
[활동 사항]
김치열(金致烈)[1921~2009]은 1921년 9월 경상북도 달성군[현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태어났다. 1943년 일본주오 대학[中央大學] 법학과를 졸업하고, 1943년 고문 문관 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였다. 1945년 4월 일본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고, 도쿄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설하였다. 김치열은 8·15 광복 후에 귀국하였고, 1946년 대구 지방 검찰청 검사를 거쳐, 1950년 부산 지방 검찰청·서울 지방 경찰청 차장 검사를 역임하였다. 1950년 법무부 검찰국 검찰 과장이 된 뒤에, 1956년 법무부 검찰국장 겸 대검찰청 검사로 승진하였다. 1958년 서울 지방 검찰청장이 되었다. 그 뒤 김치열은 1961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고, 1962년 대한 변호사 협회 인권 옹호 위원장, 1963년 중앙 선거 관리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66년에는 대일 청구권 관리 위원을 지냈다.
김치열은 1970년 중앙 정보부 차장으로 발탁되었는데, 재임 중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하였다. 1973년 검찰 총장에 임명되었고, 1975년 내무부 장관, 1978년 법무부 장관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980년 신군부로부터 부정 축재자로 지목되어 정치 활동이 규제되었고, 달성군 소재 임야 22만 8099㎡을 포함한 1000억 원대의 재산을 몰수당하였으나 2003년 소송을 통하여 1000억 원대의 부동산을 되돌려 받았다. 1980년 제일 생명 보험의 고문, 1992년 통일부 고문을 역임하였다. 김치열은 2009년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김치열은 수교 훈장 흥인장과 중국 대수경성 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