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9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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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在煥 |
영어공식명칭 | Kim Jaehwan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 강점기에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활동한 친일 관료.
[가계]
아버지는 김종윤(金鍾潤)이며, 부인은 한정순이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김재환(金在煥)[1884~1950]은 1884년 6월 3일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에서 태어났다. 1907년 일본오사카[大阪] 부립 시노노메[東雲學校]를 졸업하고, 1907년 9월 대한 제국탁지부(度支部) 서기 판임관(判任官)에 임명되었다. 이어 1908년 재무 감독국 주사 판임관 3등이 되었다. 한 일 병합 직후인 1911년 6월 평안북도 창성군수에 임명되어 조선 총독부의 지방 행정 업무를 수행하였다. 1912년 9월 평양북도 선천군 군수, 1917년 12월 경상북도 의성군 군수, 1920년 1월 경상북도 안동군 군수, 1921년 2월 경상북도 달성군 군수에 임명되었다. 그 뒤 김재환은 1926년 9월까지 경상북도 달성군 군수를 지냈다. 1907년부터 1926년까지 대한 제국 및 조선 총독부의 관료로 지냈으며, 관직에서 물러날 무렵에는 고등과 4등 종 5위에 올랐다.
김재환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 대구의 지역 유지로 활약하였다. 1923년 대구에서 설립된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 지방부에 참여하여 집행 위원이 되었다. 또 대구 은행 전무 이사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1927년 대구 학교 평의원 회원과 대구 상업 회의소 제7대 특별 의원이 되었다. 1927년과 1930년에는 경상북도 평의원, 1933년과 1937년에는 경상북도 도회 의원에 선임되었다. 또한 1932년 영남 명덕회, 1933년 대구 녹화 협회, 1935년 대구 국방 의회, 1936년 대구부 교화 단체 연합회, 1939년 경상북도 유도 연합회 등 지역의 관련 단체에서도 활동하였다. 1939년 10월 16일에는 경성 부민 회관의 조선 유림 대회에 참여하였는데, 이 대회는 국민정신총동원의 효과적 시행을 위하여 조선의 각종 유림 조직을 하나의 단체로 통합시켜 유림을 통제하는 방안을 마련할 목적으로 열렸다. 이를 통해 1939년 11월 1일 조선 유도 연합회가 결성되었다. 1939년 11월 29일 경북 유도 연합회의 결성식에서 채택된 결의 사항은 일제의 전시 동원 체제에 편승하는 것이었다. 또한 김재환은 1939년 6월 17일 경상북도 고령(高靈)에서 열린 임나 유적 기념비 제막식(任那遺蹟記念碑除幕式)에도 참석하였다. 1944년 4월 조선 총독부조선 총독의 자문 기관인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었다. 김재환은 1949년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반민 특위]에 체포되어 친일 반민족 행위에 대해 조사받고 검찰에 송치되었으나 반민 특위가 해체되면서 처벌은 받지 않았다. 김재환은 1950년 4월 5일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07년부터 1926년까지 대한 제국 및 조선 총독부의 관료로 지내면서, 일본 정부로부터 한일 합병 기념장, 다이쇼[大正] 대례 기념장, 훈 6동 서보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