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9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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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弼周 |
영어공식명칭 | Hong Pilju |
이칭/별칭 | 사량(士良),자은(紫隱) |
분야 | 문화·교육/교육,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개항기 달성 지역에서 활동한 관료이자 애국 계몽 운동가.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사량(士良), 호는 자은(紫隱). 홍만조의 6세손이며, 아버지는 성균 진사(成均進士) 홍가모(洪可謨)이다.
[활동 사항]
홍필주(洪弼周)[1857~1918]는 1857년 출생하였으며, 아버지 홍가모가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거주한 것으로 보아 홍필주도 강화군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홍필주는 1896년 1월 안동 군수(安東郡守)에 임명되었다. 1896년 3월 9일부터 안동부 참서관(安東府參書官)이었던 홍필주는 안동 재판소 검사(安東裁判所檢事)를 겸임하였다. 1896년 8월에 현풍 군수(玄風郡守)로 부임하였다. 현풍 군수 시절에 농상(農桑)을 권하고 수리(水利)를 잘 다스려, 1896년 8월에 현풍에 사는 백성들이 만인산(万人傘)을 지어 올렸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898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여 2년간 역임하였다. 1900년 1월 대구 군수(大邱郡守)를 역임하였다.
1904년 6월 일본이 조선에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는 공문과 10개 조로 되어 있는 황무지 개척권 위임 계약안을 제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 나가모리[長森藤吉郎]가 50년간 조선 전국토의 3할이나 되는 황무지의 개척 및 일체의 경영권을 넘기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홍필주는 전 비서승(前秘書丞) 윤병(尹秉), 전 승지(前承旨) 이범창(李範昌), 전 주사(前主事) 이기(李沂) 등과 함께 신사소청(紳士疏廳)을 설치하여 상소를 올리고, 규탄 선언서를 발표하였으며, 국민들에게 각성을 호소하였다. 1905년 5월 24일 이준(李儁), 윤효정(尹孝定), 양한묵(梁漢黙), 심의승 등이 발기하여 창립한 헌정 연구회에도 참여하였다. 1905년 9월 홍필주는 나인영(羅寅永), 오기호(吳基鎬) 등과 일본에 건너가 조선 침략을 규탄하는 서면 항의를 하였다. 1907년에는 대한 협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평의원을 맡았다. 또한 홍필주는 1910년 4월 16일부터 열린 국채 보상금 처리회 대총회에 충청남도 대표로 참여하였다.
[상훈과 추모]
홍필주가 재임하였던 경상북도 안동시와 대구광역시에는 애민 선정비(愛民善政碑), 달성군 현풍읍에는 청덕 선정비(淸德善政碑)와 송덕 영세 불망비(頌德永世不忘碑)가 세워져 홍필주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