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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악[달성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753
한자 兪命岳[達城郡]
영어공식명칭 Yoo Myeongak
이칭/별칭 군사(君四),요경(堯卿)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67년 - 유명악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05년 - 유명악 생원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13년 - 유명악 대구도호부 판관 부임
몰년 시기/일시 1718년 - 유명악 사망
출생지 한양 - 서울특별시
부임|활동지 대구도호부 - 대구광역시
묘소|단소 유명악 묘 -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기계
대표 관직 청주 목사

[정의]

조선 후기 대구도호부 판관을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요경(堯卿), 군사(君四). 증조할아버지는 선무랑(宣務郞) 유대의(兪大儀)이며, 할아버지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유성증(兪省曾)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지낸 유철(兪㯙)이며, 아들은 우의정을 지낸 유척기(兪拓基)이다.

[활동 사항]

유명악(兪命岳)[1667~1718]은 1667년(현종 8) 한양에서 출생하였다. 김창흡(金昌翕)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송시열(宋時烈)을 존경하였다고 전한다. 유명악의 자를 요경에서 군사로 바꾼 것도 송시열이다. 송시열이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제주도로 유배 가자 상소문을 올려 그를 변호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송시열이 신원(伸寃)되자 관직에 뜻을 두었고, 1705년(숙종 31)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였다. 이후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비롯해 장흥고 주부(長興庫主簿)·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호조 좌랑(戶曹佐郞)·호조 정랑(戶曹正郞)·개령 현감·대구도호부 판관(大丘都護府判官)·순흥 부사·청주 목사 등 여러 내외 관직을 역임하였다. 1718년(숙종 44) 청주목 관아에서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명악은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대구도호부 판관 재임 시절의 업적이 두드러진다. 유명악은 1713년(숙종 39) 대구도호부 판관을 제수 받았고, 1716년(숙종 42) 1월까지 재임하였다. 부임 직후 석빙고(石氷庫)를 건립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의 녹봉을 내어 주었다. 또한 지방관이 교체될 때 지출되는 쇄마가(刷馬價)의 오래 폐단을 줄였으며, 강창(江倉)을 증설하여 백성들이 매우 편하게 여겼다고 한다. 당시 대구도호부의 강창은 금호강낙동강이 만나는 지점인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죽곡리와 달서구 파호동에 걸쳐 있었다. 그 외에도 많은 치적을 남겼다.

[묘소]

묘는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구도호부 34면의 백성들이 유명악의 공덕을 칭송하는 송덕비를 세웠다. 현재 송덕비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명곡리에 8기,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경상 감영 공원에 1기, 대구광역시 북구 대현동 경북 대학교 박물관에 4기 등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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