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7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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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羅以俊 |
영어공식명칭 | Na Ijun |
이칭/별칭 | 택우(宅于),매음(梅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순한 |
[정의]
조선 후기 달성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수성(壽城). 자는 택우(宅于), 호는 매음(梅陰). 고조할아버지는 나경문(羅景文)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영릉 참봉을 역임한 나응두(羅應斗)이다. 증조할아버지 대에 현풍현[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으로 이주하여 후손들이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 아버지는 집의(執義)로 증직된 나용(羅瑢)이며, 어머니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과 대구 부사를 역임한 배응경(裵應褧)의 딸 성주 배씨(星州裵氏)이다. 형 나이현(羅以賢)은 장사랑 품계를 받았다.
[활동 사항]
나이준(羅以俊)[1602~1674]은 현풍현[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에서 출생하였다. 1635년(인조 13)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46년(인조 24)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성균관 유생들이 모두 당황하여 피난하기에 정신이 없었으나, 나이준은 성균관에서 수직하던 정신국(鄭信國), 박산미(朴潸美) 등과 함께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의 위판(位板)과 제기(祭器)를 자루에 담아 명륜당 북쪽에 묻었다. 그리고 공부자(孔夫子) 사성(四聖) 십철(十哲)의 위판은 나누어서 말에 싣고 유건과 도복으로 배행하여 도성을 빠져나와 무사히 남한산성에 도착하여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 위판을 경기도 광주 남한산에 위치한 개원사(開元寺)에 모셔 두었다가 1637년(인조 14) 환도할 때 다시 받들고 귀환하였다. 인조(仁祖)가 나이준의 행위를 가상히 여겨 상을 주었고, 열조(列朝)에서 여러 차례 칭찬하여 장려(奬勵)하였다. 1653년(효종 4) 정언(正言), 1663년(현종 4) 장령(掌令)에 이어 수찬(修撰)·교리(校理)·보덕(輔德) 등을 역임하였다. 숙종(肅宗) 즉위 후 부교리로 임명되었고, 집의·사간(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매음 유집(梅陰遺集)』이 있다.
[묘소]
묘는 사료의 부족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증조할아버지인 나응두의 묘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남쪽에 있다.
[상훈과 추모]
1774년(영조 50)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의 사계 서원(泗溪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