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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광문사[달성군]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384
한자 大邱 廣文社[達城郡]
이칭/별칭 달성 광문사(達城 廣文社)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06년 - 대구 광문사 설립
성격 계몽 운동 단체

[정의]

1906년 대구 달성 지역에서 설립되어 활동한 계몽 운동 단체.

[개설]

1906년 대구에서는 대구 광학회(大邱廣學會)와 다른 별개의 계몽 운동 단체로서 대구 광문사(大邱廣文社)가 설립되어 교육 운동과 경제 운동을 전개하고, 국채 보상 운동을 발기하여 전국적인 경제적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설립 목적]

대구 광문사는 1906년 대구에서 대한 자강회에 영향을 받아 설립된 자생 계몽 운동 단체로서 흥학 설교(興學設校)와 식산흥업(殖産興業)을 목적으로 하였다. 특히, 교육 진흥을 바탕으로 한 사회 발전을 목적으로 하였다.

[변천]

달성 광문사라고도 하며, 대구 광문사 내에 교육 운동을 집중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대구 광문사 문회(文會)를 별도로 설치하였다. 대구 광문사 문회는 1907년 1월 총회를 열고 이름을 대동 광문회(大東廣文會)로 바꾸고, 이 자리에서 국채 보상 운동을 발기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 광문사에는 거대 상인, 지주층, 전직 관료, 개명 유교 지식층 등 지역의 공망가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대구 광문사의 사장에는 김광제(金光濟), 부사장에는 서상돈(徐相墩)이 맡았다. 1906년 4월에 개최한 총회에서 학문 진흥과 학교 설립에 관한 방침을 의결하였다. 이를 위해 대구 광문사 내에 문회를 설치하고, 그 회원으로 400~500명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대구 광문사는 1906년 3월 새로이 경상북도 관찰사로 부임한 신태휴(申泰休)와 연대하여 학교 설립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에 신태휴는 학교 설립에 매진하라는 황제의 칙유(勅諭)와 천 원의 하사금을 매개로 하여 달성군수 김한정과 함께 관덕정(觀德亭)을 수리하여 교사 양성을 위한 사범 학교 설립에 나섰다. 여기에 대구 광문사 사원 다수가 발기인이 되어 기금 조성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또한 신태휴는 탁지부의 훈령대로 측량 강습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관찰부 소재 낙육재와 연계재 소속 전토를 합해 달명의숙(達明義塾)을 설립하고, 교장에 이현주(李玄澍), 부교장 겸 강사에 김광제 등이 맡게 하였다. 그밖에 낙육재에 공립 대구 중학교, 대구 사립 양성 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이리하여 경상북도 관내 41개 군에 370여 개의 학교가 설치되어, 학생 수가 무려 4,500여 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대구군의 학생 수는 470여 명에 달했다.

1907년 2월에 대구 광문사 문회는 학교 설립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기 위해 명칭을 대구 광문회로 바꾸고, 학문 진흥과 학교 설립에 대한 황제의 조칙을 낭독 선포한 후 회원들이 각 군을 순행하여, 학교 설립 방침과 사회적 취지를 연설하고, 학교 설립에 필요한 재원 마련 방안을 강구하였다. 또한 대구 광문사 문회는 일본동아 동문회(東亞同文會), 청나라 광학회(廣學會)와 국제적으로 연계하여 상호간 친목을 도모하는 동시에 교육 진흥을 확장시키고자 하였다.

대구 광문사 문회는 대한 자강회에서 정부에 의무 교육 실시에 관한 상소를 올리자 이어서 강제적 의무, 곧 의무 교육제를 시행하여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다시 정부에 건의하였다. 또한 대구 광문사는 출판 활동에도 역점을 두었다. 곧 동서양 서적의 번역 출판과 충효열행(忠孝烈行)에 관한 사례집을 발간하고자 하였다. 또한 각 군 관리의 잘잘못과 인민의 선악을 조사하여 매월 3회씩 잡지로 발행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대구 광문사는 출판 사업을 보다 강화시키기 위해 동사 내에 찬술원을 두었다.

1906년 5월 대구 지방에는 계몽 운동과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던 자치 조직으로서 인민 대의소(人民代議所)가 조직되었다. 인민 대의소는 민지 개발(民智開發), 민권 부식(民權扶植), 설교 흥학(設敎興學), 식산흥업 등의 진흥을 목적으로 하면서, 연령과 신분을 초월한 인민의 회의체였고, 자치 및 자강을 도모하여 국권을 확립하고자 한 단체였다. 1907년 1월 대구 광문사 문회는 문회를 대동 광문회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단연 보상 운동(斷煙報償運動)이 제기되어 국채 보상 운동이 시작되었다.

[의의와 평가]

1906년 대구 달성 지역에서 자생적 계몽 운동 단체로서 설립된 대구 광문사는 교육 운동, 문화 운동, 경제적 실력 운동 등을 전개하여 한국 근대 계몽 운동을 심화시켰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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