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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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Naruteo, Ferry |
이칭/별칭 | 강구(江口),도구(渡口),도두(渡頭),도진(渡津),진도(津渡),진두(津頭)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황상일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지역에서 강을 건너거나 하천을 따라 이동하기 위해 배가 정박하고 떠나는 시설이 갖추어진 장소.
[개설]
낙동강 중류부에 위치한 달성군 관내 55㎞ 낙동강 구간 내에 분포하고 있는 나루터는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물자 운송과, 일본과의 문화 및 인적 교류 등 무역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달성군 지역에서 발달한 나루터는 대부분 육상 교통로와 수로가 만나는 결절점에 해당하며 하빈면의 하산[하목정] 나루터를 비롯하여 주요 나루터로 다사읍의 문산[노곡] 나루터와 강정 나루터, 화원읍의 사문진 나루터, 옥포읍의 바리미 나루터, 논공읍의 노강진 나루터, 무계 나루터, 멍덕미[도진] 나루터, 오실 나루터, 현풍읍의 인안[진두] 나루터, 박석진 나루터, 수문진 나루터, 구곡 나루터, 구지면의 도동 나루터, 오사 나루터, 개포[개경포] 나루터, 부례 나루터, 답곡진 나루터, 대암진 나루터 등이 있었다.
[변천]
철도와 자동차가 교통수단으로 널리 쓰이기 이전 시기, 교량이 건설되기 전까지는 낙동강 수로를 통한 선박의 운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조선 후기 이래 화물선은 상주 낙동진까지 올라왔다는 기록이 있으나, 중간 정도의 배는 대구 사문진 이하 하류에서 운행이 가능하였다. 당시 낙동강 수운을 통해 남해안에서 실려 온 소금, 미역, 김, 어물 등의 각종 해산물과 은, 동 등의 산물은 돛단배를 통해 달성군의 나루터에서 하역되어 대소비지인 대구의 장시나 내륙 지역으로 운반되었다. 특히 김장철인 10~11월과 장 담그는 철인 3~4월은 소금 성수기로서 소금 배는 앞을 다투어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또한 낙동강 상류 지역에서 생산되는 곡물, 직물, 약재 등의 물품은 하류 지역으로 운송되어 물량의 유통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의 조선 총독부 조사에 따르면 당시 낙동강을 오르내리던 배는 400여 척에 달하였으며, 사문진에는 통과세를 받는 징세소가 설치되었다.
달성군 내에 조성된 나루터는 1905년(고종 42)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대구로 들어가고 나오는 화물 운송 기능을 철도편에 빼앗겨 예전과 같은 기능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 중엽까지만 해도 열 군데가 운영되었으나 육상 교통의 발달과 함께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교량이 건설되면서 거의 다 사라지게 되었다. 일부는 그 기능을 잃고 명칭만 전해 오는 곳이 있는가 하면 겨우 명맥만 유지하며 옛 애환을 달래는 곳도 있다. 대표적인 나루터 취락인 사문진 나루터, 도진 나루터, 개경포 나루터, 객기 나루터 등지에서는 과거에 소금배가 드나들고, 한양으로 물건을 실어 나르며 주막에서 쉬어 가던 나그네들의 모습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특히 화원읍과 다산면을 통행하던 사문진 나루터는 낙동강 수운의 집산지로 인근 대소비지인 대구로 가는 관문 역할을 하였으나 1905년(고종 42) 경부선 철도의 개통과 더불어 육상 교통이 본격적으로 발달하면서 쇠퇴하였고, 이후 낙동강에 형성된 나루터도 급속히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낙동강 강변에 있었던 대부분의 옛 나루터와 취락은 근대화의 영향으로 현재는 거의 활용되지 않고 있다.
[관련 기록]
조선 시대에 간행된 여러 지리서와 고지도에는 낙동강 중류 달성군 지역의 나루에 대한 자료가 전해진다. 나루터는 당시 낙동강 수로를 통한 수운 교통의 요지이거나 또는 낙동강 동안에서 서안을 연결하는 교통로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실제로 영남은 낙동강과 관련하여 수운 교통의 발달이 두드러진 지역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조선조 문물의 유통은 수로를 주로 이용했는데, 세미(稅米)의 경우 영남 지방에서는 낙동강을 이용하여 상주 낙동진에 모아서 육로를 이용해 점촌, 문경을 지나서 조령을 넘어 충주 가흥창(可興倉)에서 다시 한강 수로를 이용하여 한양으로 운반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당시에는 육로보다 수운 교통이 발달하였으며, 이로 인해 낙동강 유역의 여러 나루 주변에 취락들이 나타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