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탁 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385
한자 反託運動
영어공식명칭 Anti-trusteeship Movement
이칭/별칭 탁치 반대,신탁 통치 반대 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재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945년 12월 16일 -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 한국의 5년간 신탁 통치 결정
발단 시기/일시 1945년 12월 27일 - 『동아일보』 왜곡 기사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5년 12월 27일연표보기 - 반탁 운동 시작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6년 1월 3일 - 조선공산당 신탁 통치 지지
종결 시기/일시 1947년 9월 17일연표보기 - 반탁 운동 종결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독립촉성회 부안지부|김수현

[정의]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한국 신탁 통치 결정에 대한 전라북도 부안 지역 우익 세력의 반대 운동.

[개설]

반탁 운동 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협정으로 채택된 한국에 대한 신탁 통치안(信託統治案)을 반대하여 1945년 12월 27일에 한국에서 일어난 거족적인 대중 운동이다. 처음에는 반탁 입장에 섰던 좌익 세력이 찬탁 입장으로 돌아서면서 신탁 통치 문제를 둘러싼 양 진영 간의 대립이 심각한 상황으로 이어졌다.

[역사적 배경]

1945년 12월 16일 미국, 영국, 소련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외무 장관 회의를 개최했다. 당시 미국은 한국에 대한 30년간의 신탁 통치 실시안을 제안했다가, 결국 5년간의 신탁 통치안에 합의하였다. 결정의 핵심 내용은 민주 세력이 참여하여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4개국이 5년간 후원하여 조속히 독립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신탁 통치를 새로운 강대국에 의한 과거 식민 지배의 연장으로 이해하여 대대적인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좌익 진영에서도 신탁 통치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결정 사항이 알려지면서 지지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소식은 남한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심각하게 내용이 은폐되고 왜곡되었다. 『동아일보』가 한국에 최초로 보도한 내용은 소련의 주장으로 한국에 대한 신탁 통치 실시가 결정되었다는 왜곡 보도였다. 오랜 기간의 식민 지배에서 막 벗어난 상황에서 또 다시 강대국의 신탁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보도 내용은 민중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이와 함께 우익 진영에서는 ‘찬탁은 곧, 매국’이라고 주장하면서 반대했고, 좌익 진영은 찬성으로 돌아서게 되면서 신탁 통치 문제를 놓고 좌우 대립이 격화되기에 이르렀다.

[경과]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결정 사항이 전해지자, 전라북도 부안에서는 독립촉성회 부안지부가 부안읍교회 김수현 목사를 회장으로 추대하며 반탁 운동에 앞장섰다. 각 정당, 사회단체, 종교 단체가 일제히 궐기하여 ‘신탁 통치 결사반대’의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가지를 행진했고, 전라북도 부안 읍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도 많았다. 젊은이들도 참여하여 독립의 의지를 보였다. 공산당 계열에서는 정당과 사회단체를 규합하여 찬탁 운동을 벌였지만, 전라북도 부안에서는 반탁 열기가 강한 탓에 공산당의 지시에 의한 찬탁 운동은 주민들의 지지를 얻기가 어려웠다.

[결과]

신탁 통치를 둘러싼 대립은 전라북도 부안 지역에서도 찬탁과 반탁으로 나뉘면서 좌우익 간의 대립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의 지지와 지원을 받는 반탁 운동은 활기를 띨 수 있었지만, 반대로 좌익의 찬탁 운동은 위축되며 소극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조선인민공화국을 모두 부인하고 자치 기구인 인민위원회도 해산하였다.

[의의와 평가]

전라북도 부안 지역에서는 신탁 통치의 내용을 알려는 노력보다는 강대국에 의한 식민 지배의 연장으로 이해하여 반대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 과정에서 미군정의 좌익 탄압이 이어지고 미군정의 실체를 비로소 알게 되면서 ‘미군정 결사반대’라는 구호가 처음으로 나오기도 했다. 신탁 통치로 인한 찬탁과 반탁 싸움이 전개되면서 친일 청산과 자주 독립 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는 묻혀 버리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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