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작 쟁의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375
한자 小作爭議
영어공식명칭 Tenancy Disput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1년 - 부안소작공제회 조직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5년 - 원천소작동우회 설립
발생|시작 장소 소작 쟁의 - 전라북도 부안군
성격 농민 항쟁
관련 인물/단체 부안소작공제회|원천소작동우회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부안 지역의 소작농이 지주를 상대로 전개한 소작 조건 개선 운동.

[개설]

1920년대 이후 전라북도 부안 지역의 농민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서 부안소작공제회, 원천소작동우회 등의 단체를 조직하고, 지주를 상대로 소작권 이전 및 소작료 인상 등에 대한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역사적 배경]

조선은 개항과 함께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강제로 편입되고 자본주의 상품이 범람하면서 농촌 경제가 파괴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토지 조사 사업을 통해 자국의 지주제를 이식하여 조선 농촌을 지배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한일 병합 이후로 고수익의 농장을 경영하는 일본인 지주가 더욱 많아졌고, 전라북도에는 대지주가 많았다. 전라북도 부안군은 정읍·김제와의 경계선을 흐르는 동진강(東津江) 유역의 비옥한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인 소유지가 증가하면서 조선 농민의 경지 면적이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1926년 당시 전라북도 부안군에는 50정보[약 49만 5868㎡] 이상을 소유한 일본인 지주만 해도 마에다 츠네타[前田恒太郞][199.8정보], 가와노 나가쿠[川野長久][198.5정보], 스즈키[鈴木仁三郞][147정보], 가와노[川野澄生][73.7정보], 미야케[三宅助六][57.4정보] 등 5명이나 있었다. 조선인 대지주도 많아서, 100정보[약 99만 1736㎡] 이상을 소유한 지주가 5명이나 되었다. 반면 1935년 당시 전라북도 부안군의 농가는 소작농이 90% 이상을 차지했고, 자작농은 점점 감소하는 추세였다. 이와 함께 지주들은 계속해서 소작료를 높여가며 지세, 수세, 비료 대금까지 소작농에게 떠넘겼고, 1930년대 들어서는 소작권까지 회수해버리는 경우도 빈번하였다. 이에 농민들은 단체를 조직해서 집단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경과]

3·1 운동 이후 농민들은 소작농의 권익 보호를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전라북도 부안 지역에서는 부안소작공제회가 조직되어 1921년 9월 30일 제1회 정기 총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총회에서는 임시 의장 신기익(辛基益)의 사회로 지주들에게 제시할 안건을 결정했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작료는 전 수확량의 3분의 1로 정할 것, 간평원은 여러 해 경험이 풍부하고 심지가 공정한 자로 파견할 것, 소작료 수납 장소는 소작인 거주지 2리[약 785m] 이내로 할 것, 소작료 취납의 두량(斗量)은 매석(每石) 170근 이내로 할 것, 소작료를 대금으로 환산 수납할 때는 당시 시가로 수납할 것 등이었다. 당시 소작료가 50% 전후이고 소작료 수납 장소는 지주가 편리한 곳으로 정했던 것 등을 감안하면 이런 주장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은 구마모토[熊本] 농장 소유지의 중심인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와 이웃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화호리 농민들이 구마모토 농장을 상대로 벌이는 쟁의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1925년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에서 조직된 원천소작동우회는 화호노농친목회 및 김제의 백산노농친목회와 함께 삼각노농연맹을 결성하고 상호 연대를 유지하면서 지주에 공동 대응하였다. 화호노동친목회와 원천소작동우회는 1925년 10월 1일부터 10월 17일까지 직접 또는 문서로 지주 6명을 대상으로 한 소작료 인하 운동을 제휴를 통해 공동으로 전개하였다. 또한 악덕 지주와 마름의 명부를 따로 작성하여 비행을 성토하거나 시위 지도도 하였다. 1930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이리지점 백산주재소 부안농장 농감이 100여 명에 달하는 소작인의 소작권을 박탈한데 분개하여, 농감을 구타하고 쟁의에 돌입했다가 40여 명이 피검되기도 하였다.

[결과]

소작 쟁의 는 일제의 식민지 농업 정책으로 소작농이 몰락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었기 때문에 경제적 요구에서 시작되었지만 정치 투쟁으로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일제의 식민 통치가 끝나지 않는 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의의와 평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은 스스로 조직을 만들어 집단적으로 일본인 지주에 대항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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