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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가 이름 지은 영승, 역사와 전설이 깃든 전통 마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1383
한자 退溪- - - 迎勝, 歷史- 傳說- - 傳統 -
영어공식명칭 Youngseung, Traditional Village of History and Legend Named by Toegye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신라,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신용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562년 - 거열국 멸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663년 - 신라 군사에 의해 백제 부흥군 궤멸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43년 - 퇴계 이황이 장인의 회갑연 참석을 위해 영승 마을 찾음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2년 - 영승 서원 건립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에 있는 유서 깊은 전통 마을.

[개설]

영승(迎勝)은 삼국 시대의 역사와 전설이 깃든 유서 깊은 마을이다. 조선 시대에는 안의 3동 중 원학동에 자리 잡은 안의현 동리면의 중심 마을이었고,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면 소재지가 있던 곳이다. 비록 1960년대 이후 이농으로 인해 주민이 많이 줄었고 옛 집들은 현대식 건물로 바뀌고 있지만, 한때 이 마을은 180여 호의 사람들이 마치 하나의 작은 도시인 양 활기차게 살았던, 말 그대로 대촌(大村)이었다. 마을의 면모는 쉽게 바뀌지 않는 법, 지금도 영승 마을거창군 마리면에 있는 24개 자연 마을 중 가장 큰 마을이다. 마리면의 1,100여 세대 중 100여 세대가 이 마을에 살고 있으니 여전히 대촌임에 틀림없다. 예나 지금이나 영승이 거창을 대표하는 마을 중 하나라는 사실은 여전하다.

[배산임수의 풍요로운 마을]

영승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마을이다. 진산 삼거리에서 37번 국도를 타고 원학골을 잠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 물길 너머 노목들 뒤에서 문득 영승 마을이 나타난다. 그 앞에서 나그네의 발길이 멈추는 것은 뛰어난 마을의 풍경 때문이다. 마을 앞에는 북쪽 덕유산에서 발원한 거창 위천(渭川)이 큰 내를 형성하여 남쪽으로 흘러가고, 마을 뒤에는 아홉산이 연이어 작은 봉우리를 만들면서 거창읍과 경계를 이룬다. 마을에서 위천 냇가에 이르는 공간에는 문전옥답인 수반들, 괭이들이 있고, 위천을 건너면 건너괭이들, 월계들, 애말리들, 비를들이 차례로 펼쳐진다. 마을 앞에 서서 바라보면 논, 시냇물, 월계들, 학동 마을이 차례로 펼쳐져 배산임수 마을의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다만 거창 위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다 보니 마을이 서향이라 불편할듯하다. 그러나 마을에 들어가 보면 곧 지형적 약점을 해결한 옛 사람들의 지혜에 감탄하게 된다. 마을 가운데로는 뒷산에서 발원한 작은 냇물이 흘러내리고 그 양쪽에 집들이 가득하지만, 집의 본채는 대개 남향으로 지었다. 동네 앞에서 보면 오른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마을 왼편에 소나무와 대나무가 우거진 작은 동산이 있어 마을 전체의 균형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서향 마을이라는 약점을 뒷동산에 의지해 남향집을 지음으로써 보완하여 편리성과 균형미를 함께 충족시켰던 것이다.

[국경 지대의 역사는 전설을 낳고]

영승은 그 이름처럼 경치가 뛰어난 곳이지만 옛 이름은 영송(迎送)이었다. ‘영송’은 "객을 맞아들이고 보낸다."는 뜻으로 삼국 시대 백제가 신라에 보내는 사신을 이곳에서 전송한 데서 나왔다고 한다. 원학동 상류에 있는 수승대의 옛 이름이 수송대(愁送臺)로, 역시 "슬퍼하며 사신을 전송한다."는 뜻이니 전해지는 이야기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잠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럴 가능성이 있다.

영승 지역은 삼국 시대 거열국에 속했다. 5세기 거창 일대를 통일했던 거열국은 대가야 연맹의 일원으로 외교와 전쟁 양 측면에서 신라와 백제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거열국의 최고 방어 기지는 거열산성이었다. 거열산성건흥산에 있는데, 건흥산이 바로 영승 뒷산이다. 하늘에서 보면 아홉산거창읍영승 사이를 남북으로 가로질러 달리고, 그 마지막 자락에 거열산성이 있다. 옛 사람들이 거창읍영승을 드나들었던 취우재 고갯길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한때는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이용했었던지 마을 뒤에는 시장이 열렸던 장하 터가 남아있다. 562년 거열국이 신라 진흥왕의 침략으로 멸망하자 영승 지역은 이때 신라에 복속되었다.

7세기 들어 신라와 백제의 싸움이 치열해짐에 따라 영승은 국경 지대가 되었다. 이곳은 624년 백제 무왕이 함양 지역을 점령함에 따라 백제 영토가 되었고 이후 30여 년 동안 신라와 백제의 국경 지대였다. 특히 624년부터 642년까지는 영승 뒷산인 아홉산이 양국의 국경선이었다. 660년 백제가 망하고 663년 백제 부흥군거열국 부흥군과 연합하여 거열산성에서 신라에 맞서 싸울 때 영승은 그 배후 지대였다. 그러나 이 전투가 신라군의 압승으로 끝남에 따라 영승 지역은 완전히 신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를 상고하면 이곳에서 백제 사신을 전송했기 때문에 ‘영송’이라고 했다는 말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전시에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사행 길에 나섰던 백제 사신을 위해 국경 지대의 명승지였던 영송수송대에서 전별식을 열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국경 지대라는 역사적 경험은 또 하나의 설화를 낳았으니 이 마을에서 전래되는 선화 공주 설화이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백제 서동 왕자와 신라 선화 공주의 사랑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거니와 영승 마을에서 전래되는 설화는 두 갈래다. 하나는 서동 왕자가 선화 공주를 말에 태우고 영승 마을 뒷산인 취우령을 넘어 백제의 첫 동네인 이곳에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부여로 갔다는 이야기이다. 다른 하나는 신라 왕궁에서 쫓겨난 선화 공주가 취우령을 넘다가 영승에서 백제 수비대에 붙잡혀 첩자로 몰려 죽었다는 슬픈 결말이다. 서동 왕자가 바로 이 지역을 점령했던 백제 무왕이었다. 원래 설화가 다 그러하듯이 영승선화 공주 설화도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지만, 이 설화가 무왕이 이곳을 점령했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만은 부정하기 어렵다.

선화 공주 설화는 영승 마을의 문화 자산이 되었다. 취우령(驟雨嶺)이 ‘비가 몰려오는 고개’라는 뜻이듯이 취우령에 비구름이 몰려오면 곧 마을에 비가 왔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도 예부터 “취우재 비 묻었다. 설거지해라.”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비를 선화 공주의 눈물이라고 믿는다. 또한 가뭄이 들 때 취우령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선화 공주 설화는 1986년에 처음으로 채록되었고, 2013년부터 매년 선화 공주의 넋을 위로하는 취우령제를 지내고 있다. 역사는 설화를 낳았고, 그것은 다시 문화가 되어 마을의 전통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유교 전통이 뿌리를 내리다]

영승은 고려 시대 내내 이안현의 영역에 속했지만 마을 내력을 전해 주는 사료가 없다. 영승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조선 시대 초기 새로운 사족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마을을 개척하면서부터였다. 이때 정선 전씨, 광주 이씨, 선산 김씨, 파평 윤씨가 차례로 영승으로 이주해 왔다. 먼저 15세기 합천 군수를 지낸 정선 전씨 전맹겸이 정선에서 옮겨와 마을을 개척했다. 16세기 들어 연산군 때 중추부사 광주 이씨 이세걸이 전수온의 사위로 한양에서 이주해 왔고, 부호군 선산 김씨 김세염이 전식의 사위로 아들 김신옥과 함께 함양에서 이주하였다. 이어서 파평 윤씨 윤할이 한양에서 이주하였다. 이들 문중의 재실이 아직까지 마을에 남아 있다. 바로 정선 전씨의 경모재와 동원재, 광주 이씨의 영모재, 파평 윤씨의 서담재와 남호재이다.

영승 마을은 각 가문의 인물들이 당대 대학자였던 이황, 조식, 정온 등과 인적, 학문적으로 교류함으로써 반촌으로서의 명성을 더해 갔다. 그중 퇴계 이황의 방문이 가장 유명하다. 이황은 1543년 초 장인 권질의 회갑연에 참석하기 위해 영승을 찾았다. 당시 권질은 사화로 유배되었다가 영승에 사는 처남 전철 일가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권질은 전철이 마을 어귀 냇가에 정자를 짓자 한양에서 벼슬을 살던 사위 이황에게 작명을 의뢰하였다. 이에 이황은 1542년 정자의 이름을 ‘사락정(四樂亭)’이라 하고 ‘기제사락정병서(寄題四樂亭幷序)’를 함께 지어 보냈다. ‘사락’이란 네 가지 즐거움이라는 뜻이다. 이황은 이 글에서 영승에서 홀로 즐길 만한 것으로 농사짓기[農], 누에치기[蠶], 고기잡이[漁], 나무하기[樵]를 들고, 은거의 즐거움을 노래하였다. 이 시의 현판은 현재 사락정에 걸려 있다.

이황은 1543년(중종 38) 1월 3일에 도착하여 1월 7일 떠나기까지 5일간 영승에 머물렀다. 이황은 지역 사림들과 교유하는 가운데 ‘영송’이 마을 이름으로 아름답지 못하니 음이 비슷한 ‘영승’으로 고치자고 제안하였고, 마을 사림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황이 직접 쓴 “영승 마을에 머물며 사락정을 짓다[迎勝村留題四樂亭]."라는 글을 인용해 본다.

“영승촌의 옛 이름이 ‘영송’이다. 그 이름이 고상하지 못하므로 송(送)을 고쳐 승(勝)으로 하였다. 그 소리가 비슷한 것을 취한 것이다. 영승촌에는 아름다운 시내와 바위가 있었고 마침 시절이 바야흐로 이른 봄이어서 마을이 새로움을 향해 가고 있었던 때였으므로 ‘영승의 빼어난 경치를 맞이한다.’라고 하여 한 시절의 빼어남을 기록하였다. 사락정은 시내에 임하여 새롭게 지었고 지난해 내가 이름을 지어 보냈다.”

이때 이황이 남긴 시가 “이른 봄의 영승[迎勝村早春]”이었다. 이 현판 또한 사락정에 걸려 있다.

당시 이황은 당시 수승대에 은거했던 신권의 초대를 받았으나 방문할 시간을 내지 못하자 글을 지어 ‘수송대’를 ‘수승대’로 고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고, 신권은 이를 수용하였다. 이로써 ‘수송대’는 ‘수승대’로 바뀌었다. 이황의 방문을 계기로 ‘영송’이 ‘영승’으로, ‘수송대’가 ‘수승대’로 바뀐 것은 고대 국경 지대였던 이곳이 조선 시대 문화 공간으로 전환되었음을 보여 준다.

영승남명 조식과도 관계가 있었다. 선산 김씨 김신옥조식의 문하생으로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칠원 현감을 지냈던 인물이었다. 비록 기록에는 없을지라도 조식이 두 차례에 걸쳐 북상에 살고 있던 임훈은 방문했으니 그 길목에 있었던 영승에 들렸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위천 출신으로 조선 후기 전국적 인물이었던 정온의 처가가 영승에 있었다. 정온의 장인 윤할은 당대 영승으로 이주했던 인물로 당시 만석꾼으로 불릴 만큼 부자였다. 윤활의 두 아들이 주인공인 서담재와 남호재의 품격에서도 당시 윤활의 가세를 읽을 수 있다. 병자호란 후 정온의 명성이 높아 갈수록 이 가문의 위세 또한 동반 상승했음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영승이 유교 전통 마을이었으니만큼 이름난 효자와 열녀도 있었다. 정유재란 때 왜구에 저항하다 목숨으로 정절을 지켰던 전형의 아내 초계 정씨와 딸 정선 전씨의 열녀비, 부모에게 지극히 효도하였던 전택안 효자비가 마을 앞 국도변에 있다. 영승은 2012년에 효자 마을로 선정되었고 지금도 마을 앞에 효자 마을 지정비가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시대 효열의 전통이 아직까지 계승되고 있음을 알겠다.

[전통은 현대로 이어지고]

이 마을의 유교 전통은 일제 강점기에도 계속되었으니, 1932년 영승 서원이 건립된 것이 대표적이다. 1932년 이황을 추앙하는 모도계와 송준길을 추앙하는 모춘계가 사락정에서 열렸고, 이듬해에 이들 계원과 유림의 공의로 전철의 후손들이 서원을 건립하였다. 이 서원에는 이황, 송준길, 전철을 모셨다. 송준길을 함께 제향한 것은 송준길이 병자호란 때 척화파로서 잠시 영승에 은거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원 건립을 주도한 정선 전씨 문중은 1923년에 이미 정선 전씨의 선조였던 전기를 기리는 이요정(二樂亭)을 건축한 바 있었다. 이기서 ‘이요’란 산수를 즐긴다[樂山樂水]는 뜻이다.

해방 후 영승은 외관상 큰 변화를 겪었다. 마을에 있었던 조선 시대의 건축물 중 정선 전씨 전식을 기려서 위천 냇가에 세웠던 농월정과 수척정은 홍수에 떠내려가 바위만이 그 흔적을 보여 줄 뿐이며, 파평 윤씨 윤면흠의 유적인 강정(江亭)도 그 터만 남았다. 또한 이 마을 출신으로 일본에서 자수성가한 전병수의 후원으로 사락정, 영승 서원, 동원재, 이요당이 모두 개축되었다. 그중에서 중건된 이요당의 건물은 전통이 현대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는 측면에서 흥미롭다. 원래 이 터에는 재실과 이요당이 따로 서 있었는데 중건 과정에서 통합하여 2층으로 지었다. 1층에 서양식 주택 양식으로 재실을 꾸미고 2층에 전통 한옥 양식으로 이요당을 세워서 실용성과 미관을 겸비하였다. 전통의 현대화를 보여 주는 건축물이라고 하겠다.

이는 비단 전통 건축물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마을 전체가 전통의 현대화 과정에 있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기와집과 초가집으로 구성되었던 마을은 어느 듯 한옥과 양옥으로 변모하였고, 마을 가운데 흐르는 냇물은 복개되어 자동차가 드나들기 좋게 바뀌었다. 주민 구성은 더 크게 변했으니, 그 수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줄었을 뿐만 아니라 노령화되었다. 2016년 6월 22일 현재 영승 마을에는 106가구에 184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60대 이상의 인구가 103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승은 여전히 옛 전통 마을의 풍모를 보여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름다운 자연 경관, 풍요로운 들판, 배산임수의 마을은 시대의 변천과 무관하게 옛 모습 그대로이다. 아직도 주요한 전통 건축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고 마을 사람들의 전통 의식도 여전히 살아 있다. 한번 사락정에 올라 보면 운치 있는 마을 풍경과 함께 그 속에 담긴 긴 역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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