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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897
한자 郭鐘錫
영어공식명칭 Gwakjjongseok
이칭/별칭 곽도,석산,명원,면우
분야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중촌리 2252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배병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46년연표보기 - 곽종석 출생
수학 시기/일시 1870년 - 곽종석 이진상에게서 수학
활동 시기/일시 1896년 2월 - 곽종석 각국 공사관에 천하 포고문 발송
활동 시기/일시 1905년 - 곽종석 을사늑약 반대 상소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곽종석 파리 장서 운동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19년 8월 24일연표보기
추모 시기/일시 1920년 - 니동 서당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21년 - 다천 서당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63년연표보기 - 곽종석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곽종석 출생지 -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초포
거주|이주지 삼가현 신지면 -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거주|이주지 봉화 -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거주|이주지 다전 -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중촌리 2252
학교|수학지 한개 마을 한주 종택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408
활동지 곽종석 다전 강학소 -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중촌리 2252 지도보기
묘소 곽종석 묘소 -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장기리 산74-1 지도보기
성격 학자/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파리 장서에 유림 대표 서명

[정의]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파리 장서 운동 등 유림의 독립운동을 이끈 거창 거주 유학자.

[개설]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영남 유림을 대표하는 학자로 지칭되는 곽종석은 거창에서 태어났으며 장년기에 거창 지역에 이주하여 연구와 강학은 물론, 현실 문제에도 적극 개입하는 등 학문과 실천에 있어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곽종석이 주도하여 다수의 거창 유생이 가담하였던 1919년 파리 장서 운동은 근대기 혁신 유림으로의 변모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가계]

곽종석(郭鍾錫)[1846~1919]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아명은 석산(石山), 경술국치 후에는 도(鋾)라고도 하였다. 자는 명원(鳴遠), 호는 면우(俛宇)이다. 1846년(헌종 12) 6월 24일 단성현[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초포에서 동암(道菴) 곽원조(郭源兆)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호를 ‘면우’라 한 것은 살던 집의 처마가 낮고 좁아서 출입할 때 항상 머리를 숙여야 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평생을 무명옷과 짚신으로 지냈고, 명아주 지팡이를 짚었을 만큼 청빈한 삶을 살았다.

[활동 사항]

곽종석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4세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6~7세에는 사서와 시경·서경 등을 암송하였다 한다. 22세 때 삼가현 신지면[현재의 거창군 신원면]으로 이사하여 연수사 역동에서 독서하였다.

1870년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1818~1886] 문인이 되었고, 스승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을 더욱 심화시켜 퇴계학을 대표하는 학자가 되었다. 1883년 경북 봉화군 춘양으로 이사하여 퇴계학의 본고장에서 여러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곽종석은 관력보다 관직을 사양한 미담들이 더 유명하다. 1895년 1월 첫 관직인 비안 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99년 중추원 의관으로 다시 황제의 부름을 받았으나 역시 거절하였다. 1903년[58세] 통정대부(通政大夫) 비서원 승(秘書院丞)을 내리니, 8월 포의(布衣)[베옷] 차림으로 고종과 독대하여 정치의 원리를 전하면서 정학을 숭상하고[숭정학(崇正學)], 민심을 결합하며[결민심(結民心)], 군제를 정비하고[정군제(定軍制)], 국가 재용을 절약할 것[절재용(節財用)]을 상주했다. 황제가 다시 의정부 참찬에 임명하고 홍문관 경연관 겸 시강원 서연관을 내렸지만 마다하였다.

곽종석이 장년기를 맞이한 한말과 일제 초기는 국권침탈과 상실의 시련기였다. 이 시기 유림의 현실 인식은 위정척사 사상이 주류였으나, 일부는 서양을 오랑캐라 했던 종전의 화이관(華夷觀)에서 탈피하여 만국 공법에 따라 새로운 국제 질서를 수용하는 모습도 보였다. 일본의 침략 행위를 국제 사회에 폭로하여 서양 열강의 개입을 호소하는 곽종석의 방식이 이러한 근대적 혁신 유림의 한 예라 하겠다.

곽종석은 한말 의병 운동의 명분에 대해서는 공감했다. 1895년 12월 봉화의 삼계 서원에서 단발령과 변복령, 을미사변에 항의하며 의병 결성을 촉구하는 통문을 발송하였는데[삼계 통문], 그 첫 번째 서명자는 곽종석이었다. 그러나 곧 이어 결성된 제1차 안동 의병[의병장 권세연(權世淵)]에의 참여는 거부하는 다소 모순적 태도를 보인다.

무력 항쟁 대신 곽종석이 택한 것은 국제 사회에 대한 호소와 실력 양성이었다. 1896년 이승희(李承熙), 윤주하(尹冑夏) 등과 상경하여 일본인들의 난행과 패악을 각국 공사관에 글[천하 포고문(天下布告文)]로 알리고 성토하였다. 이 해에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중촌리 다전 마을로 이사하였는데, 이후 일관되게 대외 중립 하에 국제법에 의거한 의리와 실리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현실 문제에 개입하고자 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목을 벨 것과 조약의 부당함을 세계만방에 고하고 국제 공법으로 담판할 것을 상소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06년 최익현으로부터 의병 참여 제의를 받고 역량의 불충분함, 임금의 군대와 싸울 수는 없다는 점, 일제에 오히려 침략의 명분을 준다는 점을 들어 거절하였다. 대신 10년간 가르치는 데에 힘을 다하고 천혜의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결국 1910년 한일 병합의 소식을 듣게 되자 통곡하면서 여러 날 식음을 전폐하였고, 절의를 지키겠다는 의미로 이름도 ‘도(鋾)’로 고쳐 버렸다. 호적 등재와 은사금도 거부하였으며, 경학원 경상남도 강사직 제의에 대해서도 "대한의 신하가 되었으니 당연히 죽어서도 대한의 귀신이 되겠다."며 거절하였다.

1919년 곽종석의 생애 마지막 해는 ‘파리 장서 운동’으로 영원히 역사에 남을 한 해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종결 후 팽배했던 ‘민족 자결주의’와 러시아 혁명(1917)의 영향으로 독립의 희망을 키워 가던 중, 1월 고종 황제가 죽고 독살설까지 유포되자 민심이 크게 동요하였다. 이에 곽종석은 문인들과 독립 청원서[파리 장서]를 짓고 전국의 유림 대표 137인의 서명을 얻어 김창숙으로 하여금 파리 평화 회의에 제출케 하였다. 이는 파리는 물론 중국 등 주요 국가와 전국의 각 향교에까지 우송되어, 서명한 유생들에 대한 대대적 검거가 벌어졌다.

곽종석도 4월 18일 검거되었다. 처음 김창숙에게 독립 청원서에 유림 대표로 서명해 줄 것을 요청받았을 때, "망국의 대부(大夫)가 되어 항상 죽을 땅을 얻지 못함을 슬퍼하였는데 이제 죽을 땅을 얻어 대의에 죽게 되었으니 다시없는 영광"이라 하였던 곽종석은 공판에서도 당당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우리는 국법의 범법자가 아니라 포로가 된 것이니 공소할 곳이 없으며, 원수들에게 구차하게 용서를 바라지도 않을 뿐더러 호소할 곳이 있다면 하늘뿐이다.”

곽종석은 이 일로 징역 2년을 언도받았으나, 6월 22일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8월 24일 다전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이후 곽종석이 후학을 길렀던 자택의 ‘다전 강학소’도 폐쇄되었다.

[저술 및 작품]

『면우 문집(俛宇文集)』이 있다. 본집이 63책 165권, 속집이 13권, 연보 4권, 승교록 1권, 도합 183권의 영인본이 나와 있다.

[묘소]

거창군 가조면에 사당인 근화사(槿花祠)와 묘도비(墓道碑), 그리고 묘소[거창군 가조면 장기리 산74-1]가 함께 있다.

[상훈과 추모]

곽종석의 사망 후 유림과 문인들은 곽종석을 추모하기 위하여 생가가 있는 산청군 단성면에 니동 서당(尼東書堂)[1920]을, 거창군 가조면에 다천 서당(茶川書堂)[1921]을 건립하였다. 자택이 있던 거창군 가북면 중촌리 다전 마을에는 현재 ‘면우 곽종석 다전 기적비’가 설치되어 있고, 밭으로 변한 집터에는 ‘곽종석 집터’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1963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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