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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880
한자 慎晟
영어공식명칭 Sinseong
이칭/별칭 신해룡(愼海龍),한청(韓靑),신억,장원복(蔣元福),장원복(張元福)
분야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배병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2년연표보기 - 신성 거창에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32년 - 신성 한인 애국단 가담
수학 시기/일시 1934년 12월~1935년 4월 - 신성 낙양 군관 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35년 4월~1935년 9월 - 신성 조선 혁명 간부 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37년 11월~1938년 5월 - 신성 중앙 육군 군관 학교 성자 강릉 분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38년 10월 - 신성 조선 의용대 제2구대 소속 활동
수학 시기/일시 1940년 - 신성 중국 공산당 항일 군정 대학 수학
활동 시기/일시 1940년~1944년 4월 - 신성 팔로군 지난 근거지, 태행산 근거지에서 적공 간사, 조선 의용군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44년 4월~1945년 8월 - 신성 팔로군 기열료 군구 산하 청더, 선양 일대에서 지하공작 활동
몰년 시기/일시 1996년연표보기 - 신성 중국 선양에서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7년 11월 10일 - 조선 의용군 군인 대회 사적지 기념비 건립
출생지 신성 출생지 - 경상남도 거창군
거주|이주지 신성 거주지 - 중국 선양
학교|수학지 낙양 군관 학교 - 중국 허난성 뤄양
학교|수학지 조선 혁명 간부 학교 - 중국 난징
활동지 신성 활동지 - 중국 선양 등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한인 애국단|의열단|조선 민족 혁명당|조선 의용군 활동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개설]

신성(慎晟)은 1912년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태어나, 1932년 한인 애국단(韓人愛國團)을 거쳐, 1934~1935년 김구의 낙양 군관 학교, 김원봉의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졸업하였다.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후 중국 공산당 팔로군 산하 조선 의용군으로 만주에서 활동하였다.

[가계]

1912년 거창군에서 태어났다. 본명 신성 외에도, 신해룡(愼海龍), 한청(韓靑), 신억, 장원복(蔣元福, 張元福) 등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많은 가명을 사용했다.

[활동 사항]

1932년 여름 상하이에서 김구가 주도하는 한인 애국단에 가담했다. 1934년 12월 낙양 군관 학교(洛陽軍官學校)[중국 중앙 육군 군관 학교 낙양 분교 한인 특별반]에 입학하여, 1935년 4월 졸업했다. 곧이어 김원봉이 설립한 조선 혁명 군사 정치 간부 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중국 국민 정부 군사 위원회 간부 훈련반 제6대] 제3기에 입학하여 9월 졸업했다. 그 후 조선 민족 혁명당 특무 부원으로 활동했다. 1935년 10월 12일 작성된 「경고 특비(京高特秘) 제3210호」와 1936년 3월 작성된 「낙양 군관 학교 졸업생 일람표」에 의하면, ‘신해룡’이라는 가명을 쓴 신성은 의열단(義烈團) 소속으로 과거 상하이 자동차부 운전수 견습, 자전거 가게 점원 등의 이력을 가졌으며, 난징 근교 우수산(牛首山)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1936년 7월 만주로 가 항일 운동을 전개하던 중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1937년 11월 중앙 육군 군관 학교 성자(星子)·강릉 분교(江陵分校)에 입학하여 1938년 5월 졸업했다. 10월 조선 청년 전위 동맹 계열의 조선 의용대(朝鮮義勇隊) 제2구대에 참여하여 한때 중국군 제5전구에서 활동했다. 곧 제5전구를 이탈하여 연안으로 가서 중국 공산당 항일 군정 대학(抗日軍政大學) 제5기에 입학하여 1940년까지 수학했다. 그 후 팔로군(八路軍) 지난[冀南] 근거지와 태행산(太行山) 근거지에서 1944년 4월까지 적공(敵工)[대적 공작부] 간사, 조선 의용군 대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동북으로 파견되어 팔로군 기열료 군구(冀熱遼軍區)의 지도하에 청더[承德]·선양[瀋陽] 일대에서 지하공작 활동을 했다.

선양에서 해방을 맞은 신성은 1945년 8월 18일 현지의 조선인 청년들을 모아 조선 의용군 독립 지대를 창건하고 지대장에 취임하였다. 그 후 중국 관내에서 파견된 조선 의용군 선견대와 합쳐 조선 의용군 선견 종대(先遣縱隊)를 결성하고 대장이 되었다. 선견 종대원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로 한때 진출했다. 그러나 소련군의 반대에 부딪혀 선양으로 되돌아가, 조선 의용군 독립 대대장에 임명되었다. 1946년 5월 북한으로 귀국하여 1948년까지 철도 경비 여단 참모장을 지냈다. 이후 1950년까지 조선 국경 경비 제1여단 부여단장 겸 참모장을 역임하였다. 한국 전쟁 때는 조선 인민군 제8사단 부사단장 겸 참모장으로 참전했다. 1953년 7월 중국으로 가, 요녕성 민족 사무 위원회 주임을 역임했으며, 1996년 선양에서 사망했다.

[상훈과 추모]

2007년 11월 10일 선양시 위홍구(于洪区) 대흥향(大兴乡)의 오가황(吴家荒) 조선족 중심 소학교에 ‘조선 의용군 군인 대회 사적지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1945년 11월 10일 신성이 조직한 조선 의용군 선견 종대를 비롯한 조선 독립 동맹·조선 의용군 전체 대회가 이 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던 것을 기념한 것이다. 이곳은 신성이 해방 후 의용군을 모집하였던 ‘조선 의용군 등록소’가 설치되었던 곳으로, 거창 출신 독립운동가인 신성을 추모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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