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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빈 이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597
한자 河濱 李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어윤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 시기/일시 1500년 전후 - 하빈 이씨 거창 입향 추정
입향지 하빈 이씨 거창 입향 추정지 -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둔마리의 대촌지도보기
세거|집성지 하빈 이씨 거창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지산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하빈 이씨 거창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기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하빈 이씨 거창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용전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하빈 이씨 거창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월화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하빈 이씨 거창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서변리 사지 마을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하빈 이씨 거창 세장지 -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지산리 천동 마을 지도보기 장군석 날등
묘소|세장지 하빈 이씨 거창 세장지 -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둔마리 지도보기 오산재 부근
성씨 시조 이거(李琚)
입향 시조 이침(李沉)

[정의]

이거를 시조로 하고 이침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거창군의 세거 성씨.

[개설]

하빈 이씨(河濱李氏)는 문정공(文貞公) 이거(李琚)가 시조인데 고려 명종 때에 예부 상서를 지냈으며, 조위총(趙位寵)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을 평정할 때에 함께 토벌한 공이 있어서 하빈군(河濱君)에 봉해져서 하빈이 관향이 되었다. 하빈은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이다.

7세인 판관공 이침(李沉)이 거창에 입향하여 후손들이 세거하였으며, 7세손인 14세 지촌(芝村) 이현계(李賢啓)가 5형제를 두었는데 5개 파를 이루어 거창에 많이 살고 있다. 하빈 이씨는 현령공파를 비롯해 15개 파로 나뉘어 있는데, 거창에 지역 연고를 둔 파가 5개인 셈이다.

[연원]

시조 문정공 이거의 아들 이정견(李挺堅)은 상서를 지냈고, 손자인 이우당(二憂堂) 이경(李瓊)은 고려의 마지막 충신인 두문동 72현 중 한 명으로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기동 서원에 배향되었다. 입향조인 7세 판관공 이침은 이우당의 고손자이다.

하빈 이씨 14세 이현계는 만석 부호로 임진왜란 때에 난민을 많이 구제하였으며, 관직은 통정대부 부호군이었다. 이현계의 아들 5형제는 하빈 이씨 15개 파 중에 5파의 파조가 되었다. 장남 이정진(李挺辰)은 감정공파 파조이고, 차남 이정회(李挺會)는 좌랑공파 파조, 3남 이정기(李挺期)는 월담공파 파조, 4남 이정시(李挺時)는 첨정공파 파조, 5남 이정서(李挺序)는 용계공파 파조이다. 용계공파에서만 진사가 여덟 명 배출되었는데, 이는 이정서가 위기에 처한 노루를 사냥꾼으로부터 보호한 음덕으로 진사 합격자가 배출될 때마다 노루가 울었다는 전설이 있다. 마리면 월화의 이상룡(李相龍)은 1807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입향 경위]

입향조인 이침이 어디에서 살다가 거창에 정착했는지는 알 수 없고, 처음엔 거창군 남하면 둔마리의 대촌에 자리 잡았다가 후대에 지산으로 이거했다는 설이 있다. 이침의 생몰년이 확인되지 않아 입향 시기를 알 수 없지만, 이침의 고조할아버지 이경이 1337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아 입향 시기를 1500년 전후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현황]

2000년 통계에 따르면 하빈 이씨의 전국 분포는 4,657가구 15,058명이고, 거창군 내는 227가구 563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대표적인 집성촌은 거창군 가조면 기리[텃골]와 마리면 월화[새말]이며 유적도 그곳에 많이 분포한다. 2000년 현재 가조면 기리에는 46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월화에 3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관련 유적]

o 기동 서원(基洞書院): 거창군 가조면 기리 양기 마을에 있으며, 1985년 과거의 용계 정사 뒷편에 충의사(忠義祠)를 증축하여 서원이 되었다. 정몽주와 이경을 나란히 모시고, 14세 이현계와 15세 이정서를 좌우에 배향하여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묘정에는 기동 서원 묘정비가 있다.

o 육우정(六友亭): 거창군 가조면 기리 음기 마을에 있으며, 하빈 이씨 좌랑공파의 25세 이현백(李賢栢)·이현백(李賢栢)·이현기(李賢機)·이현상(李賢相)·이현정(李賢楨)·이현권(李賢權) 6형제가 육우계(六友契)를 맺고 우애롭게 지내다가 사망하자, 후손들이 뜻을 이어 일족의 화목을 위해 1918년에 지었다.

o 용계 이공 장수지소(龍溪李公藏修之所); 15세 용계 이정서가 장수(藏修)[책을 읽고 학문에 힘씀]한 곳이라는 뜻이다. 가조면 기리 광성 마을 용연재가 있었다는 서재골 아래의 암각문(岩刻文)으로, "공이 수석을 사랑하시어 용연재(龍淵齋)를 용계라 부르는 시내 위에 건축하였다[公愛水石 築龍淵齋 于溪上號龍溪]"라고 새겨져 있다.

o 망월재(望月齋): 남하면 무릉리 월곡 마을에 있으며, 입향조인 이침을 기려서 1946년에 지은 묘각(墓閣)이다.

o 모선재(慕先齋): 남하면 지산리 천동 마을에 있으며, 14세 이현계가 강학하던 곳으로 1946년에 중수했고, 경내에는 유허비가 있다.

o 봉선재(奉先齋): 남하면 지산리 신기 마을에 있으며, 15세 이정시를 위한 묘각(墓閣)으로 1971년에 세웠다.

o 오산재(五山齋): 남하면 둔마리 선산에 있으며, 평강 현감을 지낸 8세 이책(李策)을 위한 묘각(墓閣)이다.

o 월담재(月潭齋): 마리면 월화에 있으며, 15세 월담 이정기를 기려 1992년에 지었다.

o 우우재(友于齋): 남하면 지산리 신기 마을에 있으며, 23세 이시익(李時翼)·이시범(李時範) 형제를 기려서 그 제자와 자손들이 1971년에 세웠다.

o 염수재(念修齋): 마리면 월화에 있으며, 17세 이번(李蕃)과 그 형제들의 우애와 효도를 기려 1889년에 정자를 짓고 자녀를 가르치는 곳으로 삼았다. ‘염수(念修)’란 『시경』에서 유래한 말이다.

o 영모재(永慕齋): 남상면 춘전에 있으며, 16세 이방필(李邦弼) 후손이 선조 숭모를 위해 세웠다.

o 영모재(永慕齋): 마리면 말흘리 송림에 있으며 17세 이번(李蕃)과 18세 이만채(李萬彩)를 기려 1882년에 세웠다.

o 오산대(鰲山臺): 남하면 지산리 천동 마을 남쪽 어귀에 있으며, 14세 이현계가 아들 5형제와 노닐던 곳이다. 그 당시 심었다는 큰 해송이 있으며, 밑에는 15세 이정진의 유적비가 있다.

o 서재골: 남하면 지산리 천동 마을 남쪽에 있으며, 15세 이정진이 글을 가르친 서당이 있던 곳이라 한다.

o 향자암(香子巖): 가북면 수재동에서 7리쯤 떨어진 수도산 밑에 있으며, 하빈 이씨·선산 김씨·상산 김씨·흥해 최씨·죽산 전씨·밀양 변씨·함종 어씨·남평 문씨 등 9개 성씨가 이 바위 밑에서 피난했는데, 부호였던 14세 이현계와 그 부인 남원 양씨가 음식과 의복을 제공하였다고 한다.

o 월담공 유적비: 마리면 월화 마을 월담재 옆에 있으며, 15세 월담 이정기의 유적비이다.

o 용계공 유허비: 가조면 기리 광성 마을 남쪽 100m 지점에 있으며, 15세 이정서를 기려서 후손들이 세웠다.

o 기동후산 송백(基洞後山松柏)숲: 15세 이정서가 지산에서 기동으로 이거하면서 마을 뒤에 손수 심어 가꾼 숲으로, 400년의 연륜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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